| 영암성 안에서의 하루 영암 지역사 대기획 - 우리 곁의 보물 영암성 이야기 ② 선호성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
| 2025년 04월 04일(금) 1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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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영암학회가 3년간의 연구 끝에 발간한 “영암성 영암사람들”은 지역 핵심 문화유산인 영암성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한 의미 있는 성과물이다. 하지만 학술서의 특성상 일반 군민들이 접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여, 본지에서는 그 핵심 내용을 조금 더 쉽고 흥미롭게 재구성하여 4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현대 영암읍 중심가 곳곳에 흔적만 남아있는 영암성은 500여 년간 영암의 역사와 문화의 중심이었다. 최근 영암군의 문화재 보존 및 관광 자원화 노력이 진행되는 가운데, 본 기획은 군민들에게 생활 속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리고 보존과 활용에 관한 관심을 높이고자 하는 바이다.<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영암성, 숨겨진 역사를 만나다
② 영암성 안에서의 하루
③ 불꽃처럼 빛난 영암성의 순간들
④ 기억 속으로 사라진 영암성, 그리고 부활
행정의 중심, 동헌(東軒)
영암성 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단연 동헌이었다. 현재의 영암성당 터에 자리했던 동헌은 군수가 정무를 보던 관아로, 59평 규모의 본관과 숙직실, 창고 등을 갖추고 있었다.
주목할 점은 동헌 건립 시기다. 1907년 영암군청 건축물대장을 보면 ‘개국 팔십오년 건설(開國 八十五年 建設)’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1476년 이성(李城) 군수 때 건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암성이 1451년에 1차 완공된 이후, 그로부터 25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동헌이 세워진 것이다.
동헌에서는 군수가 정청(政廳)에 앉아 재판을 하고 백성들의 민원을 처리했으며, 각종 행정 업무를 관장했다. 특히 정청에서 군수는 왕의 분신으로서 남면(南面)을 하고 앉아 영암 백성들을 다스렸다.
군수의 권한은 상당히 컸다. 1897년 영암읍지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권농(勸農), 호구(戶口) 증식, 군정(軍政) 철저, 교육 장려, 징세 균등(徵稅均等), 소송 간평(訴訟簡平), 향리 부정방지 등 이른바 ‘칠사(七事)’라 불리는 일곱 가지 주요 임무를 수행했다.
동헌 우측에는 군수의 생활 공간인 내아가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영암읍 서남리 76번지에 위치했던 내아는 585평의 대지에 7칸 규모의 기와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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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의 상징, 객사(客舍)
영암성 안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건물은 객사였다. 성 안 동문 안쪽에 위치했던 객사는 왕의 전패(殿牌)를 모신 곳으로, 1872년 영암군 지도에서도 동헌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다.
1935년 발간된 「호남지」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객사는 7칸 규모였으며, 중앙에 3칸짜리 정청이 있고 좌우에 2칸짜리 익헌(翼軒)이 있었다. 정청 안쪽에는 임금의 전패를 모시는 감실(龕室)이 있었고, 익헌은 관찰사나 시험 고시관 등 귀빈들의 숙소로 이용되었다.
객사는 크게 세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첫째,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군수를 비롯한 관리들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삭망례(朔望禮)를 올리는 장소였다. 둘째, 관찰사나 중앙의 관리들이 영암을 방문했을 때 묵는 객관으로 사용되었다. 셋째, 과거 시험 중 초시(初試)를 치르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객사 앞에는 연지(蓮池)라는 연못이 있어 여름에는 연꽃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 아름다운 객사는 1909년 2월, 일본군의 실화(失火)로 인해 대월루와 함께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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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중심, 향교(鄕校)
영암 향교는 현재 서문 안에 위치하고 있지만, 본래는 동문 밖에 있었다. 「주례」 고공기의 ‘좌조우사(左祖右社)’ 원칙에 따라 동헌 좌측, 즉 동쪽에 공자의 문묘인 향교를 두어야 했으나, 영암은 성 밖에 향교를 설치했다.
향교가 현재 위치로 옮겨진 시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다. 1555년 을묘왜변 때 향교에 주둔했던 왜구들이 양달사 의병장과 영암 의병들에 의해 참살되고, 시체 썩은 냄새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아 군민들이 기피하는 시설이 되었다.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3년(계묘년) 황정노(黃廷老), 문후소(文後素) 등의 노력으로 현재의 자리에 재건되었다.
향교는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와 교육 시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학생의 정원은 50명이었으나, 군역 면제의 혜택 때문에 실제로는 훨씬 많은 학생들이 있었다. 1733년 영암향교 청금록(靑衿錄, 교생 명부)에는 무려 228명의 교생이 등록되어 있었다.
향교에서 공부한 학생들 중 소과에 급제하면 생원과 진사가 되었고, 대과에 급제하면 관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향교의 교육 기능은 크게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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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원들의 업무 공간 작청(作廳)과 군사(郡司)
동헌 앞에는 관아의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일하는 작청이 있었다.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 등 이른바 6방 관속이 근무하던 곳으로, 아전들은 이곳에서 조세 수납, 호적 관리, 재판 업무 등을 처리했다.
작청은 한자로 ‘作廳’이라고 쓰고 보통 ‘작청’이라고 읽었지만, 아전들은 ‘질청’이라고 읽었다. 이는 한자 작(作)의 훈(訓)인 ‘지을’을 축약한 ‘질’로 읽은 것이다. 1897년 영암읍지에 따르면 질청에 속하는 사령청, 관청, 서원청 등에 근무하는 아전이 85명이었다고 한다.
또한 영암성 안에는 군사(郡司)라는 시설도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토착 세력이었던 호장(戶長)들이 근무하던 곳으로, 호장은 군수를 보좌하면서 중요 문서를 관리하고 객사에 머무는 관찰사나 귀빈들의 접대 업무도 맡고 있었다.
민원과 형벌의 공간, 형옥(刑獄)
영암성 안에는 범죄자를 가두는 형옥(刑獄)이 있었다. 남문 어귀, 현재의 경찰서 마당에 위치했던 이 시설은 죄인을 재판 전까지 임시로 가두는 장소였다.
1897년 영암읍지의 형방(刑房) 관장사무를 보면, 형방에서는 죄인 관리, 도적 방지, 금주(禁酒), 가축 도살 금지 등의 업무와 함께 곤목(棍木, 나무 몽둥이), 신장(訊杖, 심문용 몽둥이), 태장(苔杖, 태형용 몽둥이), 형기(刑機, 발에 채우는 차꼬), 가판(枷板, 목에 채우는 널판지) 등 형구를 관리했다.
영암성에서 가장 먼저 이름을 남긴 사형수는 1555년 을묘왜변 때 달량성에서 왜구에게 항복한 영암군수 이덕견이었다. 그는 관찰사 김주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가, 순찰사 이준경이 내려온 후 기시형(棄市刑)에 처해졌다.
군대의 활동 공간, 군사 시설
영암성 안의 군사 시설로는 동문 주변에 군기청(軍器廳), 훈련청(訓練廳), 장청(將廳) 등이 있었다. 1897년 기준 영암군의 군역 대상자는 총 4,556명이었는데, 이 중 장교급 군관이 320명이고 사병이 4,236명이었다.
영암성 밖에는 활을 쏘는 연습장인 열무정(閱武亭)이 있었다. 1535년에 창건된 열무정은 원래 동문 밖 관무정(官武亭)이라 불리던 곳에서 시작되었다. 현재의 영암읍 동무리 62번지에 위치했던 열무정은 1854년(무오년) 어사 성공(成公)이 영암에 잠행하던 중 활쏘는 의례를 보고 600냥을 하사했고, 이를 들은 이희빈(李熙斌) 군수도 300금을 기부해 성 동쪽 높은 언덕에 새로 건립했다. 이 열무정은 1988년 전라남도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영암성에서의 하루
조선시대 영암성 사람들의 하루는 어떠했을까? 1872년 영암군 지도와 각종 문헌을 토대로 상상해보자.
새벽 동이 틀 무렵, 성문이 열리고 백성들이 하나둘 성안으로 들어온다. 동문과 남문, 서문에는 수문장들이 서서 출입자들을 관리한다.
동헌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군수가 아전들과 함께 정무를 보고 있다. 형방에서는 범죄자들을 조사하고, 호방에서는 호구를 관리하고, 이방에서는 행정 문서를 정리한다. 백성들은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작청 앞에 줄을 서 있다.
객사에서는 월 초하루나 보름이면 군수와 관리들이 모여 삭망례를 올린다. 이 날은 엄숙하게 왕의 전패 앞에서 절을 올리고 충성을 맹세한다.
향교에서는 선비들이 사서삼경을 읽으며 과거를 준비하고, 성 밖 동문 앞 영보역에서는 중앙에서 내려온 공문서가 도착하고 관리들이 말을 갈아타며 분주하게 움직인다.
동문 밖 시장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들과 주민들이 북적이고, 영암성 주변의 농민들은 들판에서 농사일에 정신이 없다.
저녁이 되면 성문이 닫히고, 성 안은 고요해진다. 동헌의 군수는 내아에서 휴식을 취하고, 성 주변의 수비병들은 교대로 밤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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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성 안팎의 사람들
영암성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성 안에는 주로 관리들과 그 가족들, 양반들이 살았고, 성 밖에는 일반 백성들이 살았다.
당시 영암에서는 ‘동문·서전·남조·북양(東文西全南曺北梁)’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동쪽에서는 장암(場巖)을 중심으로 한 남평문씨(南平文氏)가, 서쪽에서는 엄길(奄吉)을 중심으로 한 천안전씨(天安全氏)가, 남쪽에서는 구림에 세거한 창녕조씨(昌寧曺氏)가, 북쪽에서는 봉호정을 중심으로 한 제주양씨(濟州梁氏)가 세력을 떨쳤다는 뜻이다.
이들 영암의 양반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혼맥을 유지하면서 동족계(洞族契) 등을 만들어 자치 조직을 강화했다. 이들은 작청이나 영암향교 운영은 물론 향청의 조직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영암성 사람들의 신앙생활
영암성 안팎에는 주민들의 신앙과 관련된 다양한 시설들이 있었다. 동헌 서쪽에는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이 있었고, 남문 밖에는 성황사(城隍祠)와 부군당(府君堂)이 있었다.
성황사(城隍祠)는 성(城)과 해자(隍)를 수호하는 신을 모신 사당으로, 영암성에서 남쪽으로 3리 되는 곳에 위치했다. 성황신은 고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여겨져 2월과 8월에 군수가 초헌관으로 제사를 지냈다.
남문 앞에 위치한 부군당(府君堂)은 영암지역 수호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지역의 토착 세력인 호장(戶長)과 아전들이 관리했다. 1897년 영암군지에 따르면 부군당제 때는 군에서 생닭 10마리, 생밤 1말 2되, 은행 1말 2되 등 다양한 제수용품을 지원했다.
또한 동헌의 북쪽, 현재 범바위산 기슭에는 여단(厲壇)이 있었다. 불쌍한 원귀들을 달래는 제를 지내던 곳으로, 역시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지냈다.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
영암성 밖에는 영보역(永保驛)이 설치되어 중앙 정부와 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 역할을 했다.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영보역은 조선시대에는 전라우도 청암도 찰방이 관할하는 12개 소로 역 중 하나였다.
영보역에는 역장(驛長)과 역리(驛吏) 15명, 역노(驛奴) 17명, 역비(驛婢) 2명이 근무했고, 말은 6두가 있었다. 이 역은 1896년 1월 14일 고종이 반포한 칙령에 따라 폐지되었다.
영암성 동문 밖에는 큰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1897년 영암읍지의 장시(場市) 조에 따르면, 영암군에는 동문 밖 장과 독천장 두 곳의 시장이 있었다. 특히 동문 밖 장은 영암 경제의 중심지로, 다양한 물건과 식료품이 거래되었다.
휴식과 문화의 공간, 누정(樓亭)
영암성 안에는 관리들의 휴식과 문화 활동을 위한 누정들이 있었다. 가장 오래된 누정은 양휘루(楊輝樓)로, 「신증동국여지승람」(제35권)에 따르면 객관 동쪽에 있었으며, 군수 강삼(姜參, 1452-1504)이 세웠다고 한다.
또 다른 유명한 누정은 대월루(對月樓)였다. 처음에는 객관 소속이었다가 1777년 유항주(兪恒柱) 군수가 크게 재건했다. 당시 대월루는 상하층으로 되어 있었고, 1층과 2층의 면적이 각 15칸이었으며, 아래층 기둥은 모두 석주(石柱)였다. 이 대월루도 1909년 객사와 함께 일본군의 실화로 불타 없어졌다.
대월루 주변에는 연지(蓮池), 덕곡지(德谷池), 적후지(赤後池) 등 세 개의 연못이 있었다. 이 중 가장 큰 연지는 둘레가 470자(141m)나 되는 큰 연못으로, 현재 영암군청 진입로 우측의 농협 영암군지부에서부터 군청 앞 광장 중간쯤까지 이르는 범위였다.
영암성이 남긴 것
현재 영암읍 중심가를 걷다 보면, 영암성의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역사 속 기록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영암성은 500여 년 동안 영암 사람들의 삶의 중심이었다.
비록 영암성의 물리적 형태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영암읍의 도시 구조와 거리 배치, 지명 등에는 여전히 영암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역리, 서남리, 교동리, 남풍리 등의 지명은 모두 영암성과 관련된 옛 시설들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영암성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암의 정체성과 문화적 뿌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라고 본다. 지금 곁에 남아 있는 영암성의 흔적들을 소중히 여기고 보존하는 것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지켜나가는 일의 시작이 될 것이다.
선호성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