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에 담그는 김장의 혁신, 월출산에서 배우는 발효의 지혜 김장, 계절을 넘어 다시 생각하다 선호성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
| 2025년 05월 02일(금) 11:10 |
![]() |
왜 김장은 꼭 12월에만 해야 할까?
“여러분들이 김장을 몇 월 달에 해요? 12월에 보통 하죠? 왜요?”
지난 21일, 영암 월출산 자락의 김명성 참발효연구소. 한국 F&B업계를 대표하는 셰프들이 모인 교육장에서 김명성 소장의 첫 질문이 던져졌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에 이어, 이번에는 ‘봄 김장’이라는 새로운 주제로 셰프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12월 김장은 우리 문화의 깊은 뿌리처럼 당연시되어 왔지만, 김 소장은 이 관습에 의문을 제기했다. “과거에는 겨울이 되면 월동배추가 없었어요. 겨울이 추워지기 전에 배추를 담아야 그걸 쓸 수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농업 기술의 발달로 한겨울에도 월동배추가 나오는 시대. 김치냉장고가 보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김장 문화도 진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12월에 김장을 담아 놓으면 여름 배추가 필요할 때 끝납니다. 그런데 3월이나 4월에 봄 김장을 해놓으면 어떨까요? 여름에 가장 입맛이 없을 때, 신선한 김치가 나오게 됩니다”
![]() ▲ 김명성 참발효연구소장이 셰프들에게 월동배추를 활용한 ‘봄 김장’의 과학적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
월동배추의 숨겨진 가치
김 소장이 봄 김장을 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월동배추의 독특한 가치 때문이다.
“월동배추는 땅에서 온갖 환경적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기 보호 물질을 많이 생성합니다. 이 배추들은 밭에서 낮에는 녹고 밤에는 얼고를 반복하면서 놀라운 회복력을 갖게 됩니다”
2월에서 4월까지 나오는 월동배추는 여름 배추보다 영양적으로도, 맛으로도 우수하다. 여름 배추가 물이 많고 조직이 무른 반면, 월동배추는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단단하고 깊은 맛을 형성한다는 것.
“2월 배추가 달다고 많이 드셨거든요. 여름 배추는 그런 맛이 안 납니다. 게다가 올해 빼고는 이 시기가 배추 가격이 가장 저렴합니다”
가격적인 이점과 맛의 우수성, 여기에 여름철 식탁에 신선한 김치를 올릴 수 있다는 장점까지. 봄 김장은 단순한 시기의 변화가 아닌, 식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절임의 과학: 소금을 뿌리지 않는다
김 소장의 김치 담그기 과정은 일반적인 방식과 많이 달랐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배추에 직접 소금을 뿌리지 않는다는 것.
“여러분 딱 하나만 기억하세요. 배추를 절일 때 직접 소금을 뿌리지 마세요. 염수로 절이는 게 훨씬 낫습니다”
그 이유는 식물 세포의 기본 원리에 있다. 소금이 직접 닿는 부분은 세포가 터지거나 쪼그라드는데, 이렇게 손상된 세포는 저장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절대로 소금을 뿌려 절이지 마세요. 농도를 재서 염수에 담가두면 됩니다. 겨울에는 12~15%, 봄이나 가을에는 8~12%의 염도로 20~24시간 담가두세요”
더 놀라운 점은 배추를 통째로 절인다는 것. 반으로 갈라 절이는 일반적인 방식과 달리, 김 소장은 배추를 통째로 염수에 담근다. 이렇게 하면 재단이 편해지고, 김치의 아삭한 식감도 오래 유지된다고 한다.
“통째로 절인 배추는 나중에 쉽게 자를 수 있어요. 8등분으로 나눠 담아도 되고, 통째로 담아 머리만 자르고 펼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양념의 물성: 발효 속도를 결정짓는 비밀
김치의 맛을 결정짓는 또 하나의 핵심은 양념의 물성이다. 김 소장은 같은 배추, 같은 양념이라도 물성의 차이만으로 6종류의 다른 김치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성이 묽을수록 미생물의 활동이 원활해집니다. 숲길을 헤치며 달리는 것보다 광활한 벌판을 달리는 게 빠르듯이, 묽은 양념은 미생물 활동을 촉진시켜 김치가 빨리 익습니다”
이 원리를 활용하면 계절과 용도에 맞게 김치의 발효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래 저장할 김치는 양념을 되직하게, 빨리 익혀 먹을 김치는 묽게 만드는 것이다.
“여러분이 2월 김치를 담아 8개월 숙성시키려면 되직하게, 15일 만에 먹을 맛김치는 묽게 담으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온도 관리를 위한 별도의 창고 없이도 발효 속도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 |
젓갈의 비율: 재료별 맞춤 공식
양념을 만들 때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는 젓갈의 종류와 비율이다. 김 소장은 재료에 따라 젓갈 비율을 다르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억하세요. 무 종류는 새우젓이 잘 맞고, 무 외에는 액젓이 잘 맞습니다. 배추김치는 액젓 10컵에 새우젓 5컵 비율이 좋습니다. 만약 깍두기라면? 새우젓 10컵에 액젓 5컵으로 바꿔야 합니다”
젓갈 중에서도 그는 동거차도에서 온 멸치액젓을 추천했다. “액젓은 멸치액젓이 가장 감칠맛이 좋습니다. 까나리액젓은 지질 성분이 달라 느끼한 면이 있어요”
생젓(멸치 살이 들어간 젓갈)은 약간만 넣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생젓을 많이 넣으면 김치가 까매지고, 단백질이 분해되면서 유해물질이 생길 수 있어요. 액젓 10컵이면 생젓은 1컵 정도만 넣습니다”
![]() ▲ 김명성 참발효연구소장이 셰프들에게 김치에 맞는 젓갈의 종류와 비율을 시연하고 있다. |
비법 공개: 단당물로 만든 찹쌀풀
참가자들의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김 소장이 공개한 ‘단당물 찹쌀풀’이었다. 이 비법은 김치에 감칠맛을 더하면서도 단맛이 튀지 않게 하는 묘약이다.
“설탕 1에 물 10 비율로 단당물을 만들고, 여기에 하루 불린 찹쌀을 넣어 풀을 쑵니다. 이렇게 하면 설탕의 단맛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감칠맛이 살아납니다”
그는 일반적인 당 첨가와 달리, 이 방식이 김치의 저장성에도 영향을 덜 준다고 설명했다. “일반 설탕이나 과일청은 미생물의 먹이가 되어 빨리 시어지지만, 단당물은 에너지원으로 바로 흡수되어 김치 맛을 해치지 않습니다”
믹서기 대신 손가락으로: 맛의 차이
김치 양념을 만들 때 김 소장은 믹서기 사용을 강력히 반대했다. 그 이유는 재료의 자기 보호 물질과 관련이 있다.
“무딘 칼로 천천히 베는 것과 예리한 칼로 순간에 자르는 것,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울까요? 믹서기는 재료를 순간적으로 잘라버려 자기 보호 물질을 내지 못하게 합니다”
대신 그는 김치 가는 전용 기계를 사용하고, 손으로 양념을 버무릴 때도 손바닥이 아닌 손가락으로만 작업했다. “손바닥으로 문지르면 점액이 생겨 김치가 번들번들해지고 이취가 납니다. 항상 손가락으로만 저어주세요”
![]() ▲ 김명성 참발효연구소장이 셰프들에게 손바닥이 아닌 손가락으로만 김치 양념을 버무리는 올바른 방법을 시연하고 있다. |
봄김장, 여름을 준비하는 지혜
김명성 소장은 마지막으로 김치의 가능성을 강조했다. “김치는 양식이든 한식이든 어떤 음식을 하든 활용할 수 있는 만능 식재료입니다. 김치의 원리만 이해하면 다양한 응용이 가능합니다”
봄 김장은 계절의 변화를 읽고, 자연의 순환에 맞춰 식생활을 조절했던 선조들의 지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12월에만 김장을 담그던 관습에서 벗어나, 봄의 월동배추를 활용해 여름을 준비하는 새로운 식문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 소장의 “게으름의 산물”에서 시작된 이 혁신적인 접근법은, 전통을 고수하기보다 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창의적 사고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월출산 자락에서 시작된 이 작은 변화가 한국 식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지 주목된다.
에필로그
누구나 한 번쯤은 “왜 이렇게 해야 하지?”라는 의문을 품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의문을 직접 실험하고, 과학적으로 탐구하여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명성 소장의 봄 김장은 그런 끊임없는 질문과 실험의 결과물이다.
아내가 김치를 담가달라고 했을 때 “김치를 꼭 속을 넣어야 할까?”라는 단순한 의문에서 시작된 그의 여정은, 이제 한식의 세계화라는 큰 흐름의 일부가 되었다. 월출산 자락에서 태어난 이 작은 혁신이 우리 식문화의 미래를 어떻게 바꿔갈지 기대해본다.
선호성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