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가 거둔 시신과 어머니가 찾지 못한 무덤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2) #01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5년 06월 20일(금) 11:13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학산면 용산리 김달수 희생사건

학산면 용산리 김달수는 1948년 11월~12월경 좌익활동 혐의로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다가 결혼한 누나 김달심(여·당시 25세)이 거주하던 서호면으로 피신하여 지내던 중 경찰에게 붙잡혔고 경찰은 김달수를 ‘송정리등’으로 끌고 가 사살하였다고 한다.

신청인 김달심(서호면 화송리 회현마을)은 “동생은 서호면 금강마을 산에 굴을 파고 숨어 있다가 경찰에게 붙잡혀 ‘송정리등’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나도 총소리를 들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와서 동생이 총을 맞았다고 알려주었다. 내가 동생 시신을 거두어 매장했다”고 진술하였다.

학산면 용산리 참고인 ○○○(당시 17세)는 “김달수가 젊은이들과 몰려다닌 일로 경찰을 피해 숨었다가 붙잡혔는데 경찰이 취조하러 데리고 가다 죽였다고 알고 있다. 여순사건이 나고 난 뒤의 일이다”라고 진술하였다.1)

김달수가 희생된 시기에 대해 김달심은 “연도는 모르나 전쟁 전이고, 내가 25살 때”라고 하였고, ○○○는 “여순사건 후”라고 진술하였다. 김달수의 제적부는 1970년 화재로 멸실되어 그해 재제하였는데, 김달수의 사망사실이 기재돼 있지 않았다. 김달심과 ○○○의 진술로 보아 사건발생시기는 1948년 11월~12월경으로 추정된다.

조사결과 김달수의 시신은 사건 직후 바로 수습되었는데 신청인, 참고인의 진술로 보아 김달수는 좌익혐의로 피신생활을 하던 중 경찰에게 붙잡혀 연행되던 중 사살된 것으로 판단된다.


도포면 성산리 김종우 희생사건

도포면은 영암면 서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1950년 10월 31일경 수복되었다.2)

김종우의 동생 김종성(당시 21세)에 의하면 성산리 주민 김종우는 교사 시험에 합격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았는데, 인민군 점령기에 교편을 잡았다고 한다.3)

중 일부는 금정면 쪽으로 피신하였으나, 김종우는 다리에 장애가 있었던 탓에 옆집(사촌 김종술의 집)에 숨어 있었다. 김종우는 1950년 11월 19일 마을 수색을 하던 청년단에게 검거되어 도포지서를 거쳐 영암경찰서로 연행되었고 이후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다.

당시 김종우가 피신해 있던 집 주인 김종술(당시 24세)은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성산리 청년단장이었던 부친이 전쟁 전 반란군에게 살해돼 인공 때는 반동가족으로 몰려 피신하였다가 수복된 후 마을로 돌아왔다. 사촌(김종우)이 다리가 불편해서 멀리 피신 못하고 옆집인 우리 집에 숨어 있다가 부락을 수색하던 ‘도포면 청년단’에 붙잡혔다. 청년단에 있는 친구들에게 ‘나를 봐서 동생을 살려주라’고 부탁했지만 결국 도포지서로 넘겨졌다. 도포지서에서 조사를 받은 후 그날 안으로 영암경찰서로 넘겨야 한다고 해서 내가 도포지서 경찰들과 함께 영암경찰서 앞까지 종우와 동행하였다. 종우를 빼낼 방법을 의논하러 친척들과 유지들을 찾아다니다 경찰서에 다시 가보니 이미 어디다 죽여 버렸는지 종적이 없었다. 나는 그날로 의경에 지원하였다.4)”


이웃 영호리 주민인 ○○○(당시 17세)은 “김종우는 전쟁 전부터 ‘삐라’ 등을 붙이고 다녔는데, 수복 후 경찰 손에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진술하였다.

김종우의 모친은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했지만 찾지 못했다고 한다. 제사는 끌려간 날인 음력 10월 10일에 지내고 있었다.5)

‘김해 김씨’의 족보에는 ‘金鐘貴(김종우의 이명) 忌 10月 10日 墓 失傳6)48)’이라고 기록돼 김종우가 연행된 날과 행방불명 사실을 적시하고 있었다.

조사결과 김종우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으나 김종우가 영암경찰서에 연행된 것을 목격한 참고인 김종술의 진술과 이를 뒷받침하는 전문 참고인 ○○○의 진술이 있고 유족 김종성의 진술과 족보에 기재된 내용이 일치하여 김종우가 도포면 수복 이후 부역혐의로 영암경찰서로 연행된 후 살해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다음에 계속


1) 신청인 김달심 진술조서(2008.3.14); 김달수의 부모 김영현ㆍ박탑동은 수복이후 토벌작전을 벌이던 경찰에게 희생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1)’ 진실규명 결정(2008.12.30)
2) 영암경찰서 경무과 소장 「퇴직자이력서철」에서 확인한 순경 조형기의 기록에는 ‘1950년 10월 31일 도포지서 명’이라고 기록되었다.; 참고인 ○○○ 진술조서(2008.11.4)
3) 사건번호 다-47호의 신청인 김종채(김종우의 동생)가 조사기간 중 사망하여 조사하지 못했다. 따라서 사망한 신청인을 대신하여 김종우의 다른 동생인 김종성을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하였다. 참고인 김종성 진술조서(2010.3.24)
4) 참고인 김종술은 “그날로 나는 영암경찰서 의경으로 들어가서 광주 경찰학교에 지원, 훈련을 받은 뒤 특공대(기동대)에 편입, 토벌작전에 나갔다가 영암경찰서 순경, 장흥경찰서 순경으로 있었는데 질서가 회복된 후 그만두었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김종술 진술조서(2010.3.25)
5) 족보(金海金氏家乘, 1980)에도 김종귀(김종우의 이명)의 기일은 10월 10일로 기재돼 있다. 참고인 김종성 진술조서(2010.3.24)
6) 실전(失傳)은 묘지, 고적 등 세전(世傳)의 사실이 알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민중서림, 민중 엣센스 국어사전, 1991.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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