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으로 사라진 영암성, 그리고 부활

영암 지역사 대기획 - 우리 곁의 보물 영암성 이야기 ④

선호성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5년 06월 20일(금) 11:51
▲ 영암읍교회 뒷길


2024년 영암학회가 3년간의 연구 끝에 발간한 “영암성 영암사람들”은 지역 핵심 문화유산인 영암성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한 의미 있는 성과물이다. 하지만 학술서의 특성상 일반 군민들이 접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여, 본지에서는 그 핵심 내용을 조금 더 쉽고 흥미롭게 재구성하여 4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현대 영암읍 중심가 곳곳에 흔적만 남아있는 영암성은 500여 년간 영암의 역사와 문화의 중심이었다. 최근 영암군의 문화재 보존 및 관광 자원화 노력이 진행되는 가운데, 본 기획은 군민들에게 생활 속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리고 보존과 활용에 관한 관심을 높이고자 하는 바이다.<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영암성, 숨겨진 역사를 만나다
② 영암성 안에서의 하루
③ 불꽃처럼 빛난 영암성의 순간들
④ 기억 속으로 사라진 영암성, 그리고 부활


일제가 지우려 한 영암성

“내각령 제1호, 성벽처리위원회에 관한 건...”

1907년 7월 30일, 이완용이 서명한 대한제국 관보에는 성벽 철거에 관한 내각령이 실렸다. 일제의 첫 번째 조치 중 하나가 조선의 성곽들을 허물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도시 재개발이 아닌, 조선인들의 정체성과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한 의도적 행위였다.

영암성 역시 이 비극적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일제는 크게 네 가지 이유로 영암성을 파괴했다:

첫째, 영암성은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었기에 일본인들에게는 불편한 역사적 상징이었다.

둘째, 일본 상인들의 장사 편의를 위해 도로를 확장해야 했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 이후 무관세 무역이 가능해지자 일본 상인들이 영암에 몰려들었고, 그들은 성문을 통과하기 어려운 점을 민원으로 제기했다.

셋째, 군사적 목적이 있었다. 1908년부터 심남일 부대가 금정 국사봉을 중심으로 활동하자 일본은 영암성을 헌병대 주둔지로 변경했다. 체포한 의병들을 동원해 성벽의 돌을 해체해 장흥으로 가는 신작로 확장에 사용했다.

넷째, 성곽의 돌과 흙은 값진 건축자재였다. 토지조사사업 후 헐값에 성터를 불하받은 일본인들은 성돌로 집과 가게를 지었고, 일부는 이를 팔아 이득을 취했다.

▲ 1905년 을사늑약을 맺고 나서 이등박문 내각이 공포한 첫 번째 내각령 ‘성벽처리위원회 설치에 관한 건’


사라져가는 영암성, 그리고 군민들의 무관심

일본인 미야케히로오가 1984년 발간한 「피와 땀과 눈물의 기록, 추억의 영암」에 포함된 그림들은 영암성이 점차 사라져간 과정을 보여준다. 요시타케다케오가 그린 1911년과 1919년 영암성 그림을 보면, 동문 좌측을 제외하고는 성벽 윤곽이 온전했다. 그러나 미나미야마토미오가 그린 1941년 그림에서는 동문에서 신사까지 성곽이 대부분 허물어졌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한 1941년에는 동헌 뒤쪽 성벽을 허물고 제1방공 감시소와 제2방공 감시소를 설치했다. 영암성 내에는 헌병대가 주둔했고, 객사등에는 신명신사가 올라앉았다.

해방 후에도 영암성의 훼손은 계속되었다. 1970년대 영암정수장 설치, 새마을사업, 그리고 2009년 동무지구 개발사업 등으로 성벽은 더욱 파괴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국유지였던 성터에 무허가 가옥을 지으면서 경찰서 뒤쪽과 영암공원 주변에는 달동네가 형성되기도 했다.

1972년 항공사진을 보면, 영암군청 뒤편의 숲이 울창했고 열무정 앞 성곽 야산 능선에는 길이 뚫려 있었다. 그러나 1978년 사진에서는 도로 확장으로 성벽이 더 훼손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1983년 사진에서는 동헌 뒤쪽 영암정수장 공사로 북쪽 성곽이 거의 완전히 사라졌고, 영암공원 진입로가 좁아졌으며, 영암읍사무소 주변으로 상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 영암성의 훼철(위의 좌측 : 일반 가옥 허청 , 위의 우측 중앙교회 앞 담장, 아래 좌측 1979년 충혼탑, 아래 우측 영암성당 계단)


새롭게 발견되는 영암성의 흔적들

2011년 영암군은 전남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동무지구 개발사업을 위한 시굴 조사’를 실시했다. 예상외로 많은 성곽 유구들이 발견되었다. 경찰서 뒤편 성벽의 기단부와 내탁부(성 안쪽에서 흙을 쌓아올린 부분) 흔적이 일부 보존되어 있었고, 무등아파트 뒤편에는 각자성석(刻字城石)과 성벽 일부가 남아있었다.

무등아파트 뒤편과 영암읍교회 뒤편의 영암성 성곽을 살펴보면, 조선 초기 작성된 「도선국사답산기」에 기록된 대로 “성을 쌓을 때는 구릉을 최대한 이용하고, 해자를 만들 때는 천택(川澤)을 이용하라”는 맹자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음을 알 수 있다.

2018년 광주전남연구원 김만호 연구위원은 “종합적인 발굴 조사를 바탕으로 문화재로 지정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런 움직임에 발맞춰 영암군은 영암성 복원 사업을 군수 공약사업에 포함시켰다.

▲ 2021년 여름 영암읍성 발굴 현장


영암성 복원을 위한 노력들

2016년 하반기, 영암군은 동무지구 개발사업 이후 두 동강 난 채 방치된 성터를 연결하기 위해 「달맞이공원 조성계획 변경」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두 도막으로 나뉜 성터를 보도교로 연결하고, 경찰서 뒤편에 양달사 의병장의 영암성대첩 승전 기념비를 조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2021년에는 전남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영암읍성 보존 및 활용 방안 연구용역’을 추진했다. 현재는 보도교 공사가 진행 중이며, 영암성 복원을 위한 여러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영암군이 계획 중인 영암성 복원 관련 사업들은 다음과 같다:

1. 전체적인 정밀지표 조사: 2.01km 전 구간에 걸친 조사를 통해 영암성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고 보존 방안 마련

2. 문화재 지정: 영암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체계적 보존 추진

3. 주요 시설물 및 전적지 표지판 설치: 1555년 5월 25일 영암성대첩 전적지 등에 표지판 설치

4. 남문 등 일부 시설 복원: 경찰서 뒤편과 무등아파트 뒤편을 연결하는 남문 복원

5. 영암성길 및 대첩길 조성: 영암성 윤곽을 따라 '영암성길'과 양달사 의병대가 매복했던 범바위산부터 금교언까지 이어지는 '영암성대첩길' 조성

6. 영암성대첩 기념 조례 제정: 매년 5월 25일을 영암성대첩 기념일로 정하는 법적 근거 마련

7. 양달사 의병장 선양사업: 장독샘 주변 정비, 양달사 의병장 궁도대회 개최, 영암읍 중앙로를 양달사로로 개명 등


영암성, 우리 곁의 보물로 다시 태어나다

현재 영암군은 무등아파트 뒤편에서 경찰서 뒤편까지 약 500미터가 넘는 성길을 조성할 계획이다. 달맞이공원 사업을 완료하여 열무정과 경찰서 뒤편을 연결하고, 남문을 건립하여 무등아파트 뒤편 성벽과 연결한다면, 영암읍 시가지와 월출산의 보름달을 조망할 수 있는 탐방로가 될 것이다.

영암성의 부활은 단순한 문화재 복원을 넘어 영암군민들에게 자긍심과 정체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 500년 전 왜구의 침입을 막아낸 영암성대첩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일제의 탄압에도 끝내 지워지지 않은 영암성의 흔적들이 다시 빛을 발할 날이 곧 오리라 기대한다.

영암성에 담긴 선조들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끈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그것은 바로 우리 곁에 있는 보물의 가치를 알고, 함께 지켜나가는 일의 소중함이다. 영암성은 단순한 돌담이 아니라, 영암 사람들의 역사와 미래가 담긴 살아있는 유산인 것이다.


“성돌 모으기 운동” 추진 검토

영암군은 대구 동구청의 ‘성돌 모으기 운동’을 참고해 영암성 성돌을 수집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현재 영암정수장 주변, 영암읍교회 입구, 영암성당 입구, 수성사 뒤편, 원불교 건물 주변 등에는 영암성 성돌들로 쌓은 담장이 산재해 있다. 이를 모아 남문을 중심으로 성곽을 연결하는 복원 사업에 활용할 계획이다.
선호성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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