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갑산 아래 스러진 봄 - 1949년, 네 남자의 마지막 길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2) #03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5년 07월 04일(금) 10:16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도갑리 최월규 희생사건

도갑리 죽정마을 최월규는 좌익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던 중 1949년 4월 22일 마을에서 체포되어 군서지서로 연행된 후 사살되었다고 한다.

최월규의 6촌동생인 최○○(당시 16세)는 “최월규는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마을에서 경찰에게 붙잡혀 지서로 끌려갔다. 당시 군서지서에는 좌익 쪽 가담자의 가족들이 천막 안에 감금돼 있었다. 경찰이 최월규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서 ‘너 때문에 이 사람들이 잡혀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직후 마을 뒷산 골짜기로 끌려가서 즉결처분되었다. 시신은 수습하여 그 부근에 매장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당시 18세)은 “최월규는 부역자였는데 경찰에 체포되어 죽었다”고 진술하였고, 참고인 ○○(당시 19세)은 “최월규는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다 경찰에게 붙잡혀 지서로 끌려간 뒤 총살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최월규의 제적부에는 ‘1951년 3월 23일 사망’으로 기재돼 있어 연도는 다르나 날짜는 최월규의 제사일과 부합하였다. 최월규의 족보에는 ‘1949년 3월 24일 졸’로 기재돼 실제 사망일과 일치하였다.

조사결과 최월규는 빨치산으로 입산 활동 중 경찰에 붙잡혀 군서지서로 연행된 후 사살된 것으로 판단된다.


도갑리 최주호·곽복수 희생사건

1949년 5월경 도갑산 밑에 있는 죽정마을에는 밤이면 ‘밤손님’이 내려오는 일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다음날이면 경찰이 와서 지난밤에 누가 다녀갔고 누가 이들에게 밥을 해주었냐며 주민들을 다그치는 일이 잦았다. 최주호와 곽복수는 ‘반란군 심부름’을 했다고 군서지서(당시 신근정에 위치)로 연행되어 취조를 받던 중 1949년 5월 28일 덕진면에서 사살되었다.

곽복수의 여동생 ○○○(여·당시 19세)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오빠의 친한 친구인 최주호가 지서에 붙들려간 며칠 뒤 오빠가 망태 들고 집을 나서다 집 앞에 있던 순경 2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다음날 경찰이 오빠를 도갑산으로 끌고 다니는 것을 주민들이 목격했는데 오빠한테 도갑산에 있는 굴을 찾으라고 했다는 소문이 났다. 결국 잡혀간 지 사흘 만에 신북면 가는 길에 있는 속칭 ‘한새다리’에서 죽였다는 소문이 돌아 큰오빠 곽두수1)가 시신을 찾아왔다. 시신을 매장할 때 내가 오빠와 최주호의 시신을 보았는데 오빠는 어깨도 분질러져 있었다. 총알이 관통해 이마도 터지고 칼로 여기저기를 쑤셔놓았다. 보통 한 명이 잡혀가면 ‘반란군 심부름했다’고 마을에서 줄줄이 잡혀가는데 오빠가 모진 고문에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오빠 다음에 더 이상 잡혀간 사람이 없어서 동네가 조용했다.”


최주호의 처 이계례(여·당시 27세)는 “경찰이 남편을 지서에 며칠간 가두었다. 곧 내보내 준다 해서 지서로 밥을 나르지도 않았는데 덕진면에 있는 산으로 데려가 죽였다. 1949년 5월 28일(음력 5월 1일)이다. 나는 작은 아들을 임신한 상태라 동네 사람들이 가서 시신을 수습해 왔다”고 진술하였다.

죽정마을 참고인 ○○(당시 19세)는 “최주호, 곽복수는 지서에 끌려간 뒤 살해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당시 18세)은 “최주호, 곽복수는 부역자라 해서 경찰에게 죽었다”고 진술하였고 곽복수의 여동생 ○○○도 “오빠(곽복수)가 굴 파는 것을 도와주었는지 시키니까 할 수 없이 판 것인지 모르겠는데 그것이 발각된 것 같다”고 진술한 점으로 미루어 이들은 반란군에 협조 또는 좌익혐의로 군서지서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던 중 사살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들의 구체적인 혐의내용은 알 수 없었다.

유족과 참고인의 진술에 따르면 이들의 제사일은 음력 4월 30일이고 최주호의 처와 곽복수의 처 모두 남편의 사망 이후 유복자를 낳았다.

최주호의 제적부에는 ‘1959년 7월 5일 사망’, 곽복수의 제적부에는 ‘1950년 11월 12일 사망’으로 기재돼 있어 실제 사망일과 일치하지 않았다. 최주호는 족보에 ‘1949년 4월 30일 졸’로 기재되어 연도와 기일이 일치하였고, 곽복수의 족보에는 ‘1950년 4월 30일 졸’로 기재돼 제사날짜가 일치하였다.2)


도갑리 박석열 희생사건

도갑리 죽정마을 박석열은 1949년 6월 6일경 좌익의 심부름을 한 혐의로 군서지서로 연행되었다고 한다.

죽정마을 참고인 ○○○(당시 18세)은 “박석열은 나이가 많지 않아 심부름, 연락해주는 정도의 일을 했었는데 지서로 붙잡혀 가서 손가락이 찢어지는 고문을 당하고 맞아 죽었다. 경찰은 박석열의 시신을 독천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야산에서 총살된 것으로 위장했다”고 진술하였다.

죽정마을 참고인 ○○(당시 19세)도 “박석열은 반란군 심부름을 했다고 지서로 붙잡혀 가서 죽었다”고 진술하였다.

박석열의 동생 박호(당시 7세)는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로 형은 지서로 불려갔다가 다음날 머리에 총상을 입어 골이 깨지고 손과 발 마디가 분질러지고 손바닥에 구멍까지 뚫리는 등 너무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는데 형의 시신을 보고 온 어머니가 충격으로 실신하였다. 밤손님이 다니던 때라 아버지3도 피신하였고 숙부도 군에 입대하였지만 형은 집에 남아 있다가 할 수 없이 밤손님의 심부름을 하였던 것 같다”고 진술하였다.

박석열의 시신은 가족에 의해 수습되었으며, 제사일은 5월 9일이었다.

박석열의 제적부에는 ‘1951년 5월 20일 사망’으로 기재돼 있다.

조사결과 경찰이 박석열을 구타하여 살해하였는지, ‘송정리등’으로 끌고 가 사살하였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박석열이 좌익 심부름을 하였다는 이유로 군서지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던 중 살해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다음에 계속


1) 시신수습자 곽두수(1916년생)는 생존하고 있으나 고령으로 사건현장과 지명 등에 대해 조사할 수 없었다.
2) 청주곽씨세보(1972.2)에는 “곽복수 庚寅四月三十日卒墓道岬山”라고 기재돼 있었으나 가족들은 곽복수 사후에 유복자로 둘째아들 곽창현이 음력 1949년 12월 2일 출생하였고 최주호의 둘째아들 최영추도 1949년 7월(윤달) 2일에 유복자로 출생하였다고 진술하여 이들의 실제 사망일은 1949년 음력 5월 1일임을 확인하였다. 참고인 이계례·최영추 통화보고서(2010.4.14); 참고인 ○○○ 진술조서(2010.3.25); 참고인 곽열 통화보고서(2009.3.4)
3) 박석열의 부친 박옥재는 1951년 1월 2일 군서지서 경찰에게 살해된 희생자로 진실규명 결정된 바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1)’ 진실규명 결정(200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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