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나
영암열린신문 opennews@openmedia.co.kr
2025년 08월 14일(목) 11:12


만약 실상 없는 이름이 있을 수 있다면 소리가 없는데 메아리가 있는 격이고,
형체가 없는데 그림자가 있는 격이니, 이는 필시 있기 어려운 이치이다.

如使無實而可以有名, 則是無聲而可以有響, 無形而可以有影, 此必無之理也.
여사무실이가이유명, 즉시무성이가이유향, 무형이가이유영, 차필무지리야.


- 정종로(鄭宗魯, 1738~1816), 『입재집(立齋集)』 「허명변(虛名辨)」 중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허울의 메아리에 둘러싸여 생을 허비하는 기분이 든다면, ‘이름 없는 나’를 소환해야 하는 때이다. 내 안에 존재함을 스스로 분명히 느끼기에, ‘진짜 나’에는 이름 붙일 필요가 없다. 이름 없는 혼자로 돌아오는 것, 이것이 나를 잃어버린 듯한 기분에서 회복하는 방법이다. 애써 타인에게 설명할 필요 없는 혼자로 돌아와 고요해지면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나만이 아는 나. 그런 내 안의 소리를 정확히 들을수록 삶의 밀도는 높아진다.

여기저기에서 나를 호명하는 메아리가 종종 따갑거나 무겁게 들리기도 한다. 붙여진 이름에는 무게가 지워지고 이름 주변으로 허황한 명성이나 오해가 모여들기 마련이다. 그러니 학문을 소명으로 삼은 이에게 이름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름이 알려지길 원한 것이 아니라, 나의 길을 가려고 학문하는 사람에게 공부는 수행이다.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도 공부는 완전할 수 없고 늘 갈증을 느끼며 배우면서 살아갈 뿐이다. 타인의 입에 의해 허상의 이름이 불리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자아를 굳건히 세우고자 애쓰는 삶. 조선의 학자 정종로(鄭宗魯, 1738~1816) 역시 그런 삶을 살고자 했다.

정종로는 「허명변(虛名辨)」에서 실상 없는 이름은 소리 없는 메아리나 형체 없는 그림자와 같다면서, 자신의 이름 역시도 실상 없이 알려졌다고 토로했다. 옛 선비의 이름은 헛되이 붙여지지 않았는데, 반면 정종로 자신은 공부가 엉성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학문에 뜻을 둔 문장가로 자신을 지목했다며 한탄한 것이다. 또 다른 글 「자책(自責)」에서는, 시문(詩文)에 부족함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더라도 학문과 도(道)에서 실질적 알맹이가 없는 것은 큰 죄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정종로의 자조적 고백은 곧 그가 공부의 여정에서 추구하는 방향은, 이름이 알려져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떳떳한 내면세계를 꾸려가는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울린 이름으로부터 이름의 주인은 소외되기 십상이다. 나다운 나와 괴리된 생활에선 진실한 기쁨을 누리기 어렵다. 어쩌면 껍데기에 불과한 이름이다. 이름을 벗어버리면 드러나는 민낯의 ‘이름 없는 나’와 화해한 삶을 살고 싶어서 공부의 길을 택했다. 선배 학자 정종로의 「허명변」이 각별한 의미로 와닿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부족한 나의 면모를 가꾸는 학문의 나날 위에서 이름이라는 포장지 없이도 결연할 수 있는 삶을 지향한다. 메아리보다는 메아리를 만들어낸 중심의 소리에, 그림자보다는 그림자를 드리운 본체의 모양에 마음을 쏟아 다듬고자 한다. 그렇게 갈고 닦은 진짜의 나를 스스로 제일 좋아하고 싶다.

최다정 고려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한자 줍기』·『시가 된 미래에서』 저자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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