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동의 겨울, 꺾인 청춘들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2) #07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5년 08월 14일(목) 11:15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서호면과 경계에 있는 서구림리 백암동마을은 군서면에서도 외진 곳이다. 참고인 ○○○(당시 21세)는 “백암동마을은 큰 도로에서 떨어진 외진 곳이라 젊은 사람들이 피신해 오기도 했다”고 진술하였고 당시 군서지서 소속 경찰 ○○○(당시 22세)은 “백암동마을은 으슥하고 외진 곳으로 적이 숨어 있다가 서호면으로 도망갈 수도 있는 곳이라 여러 번 작전을 나갔다”고 진술하였다.

1950년 12월 5일 당시 구림지역은 완전히 수복이 되지 못한 상태였다. 수복 직전 경찰의 토벌작전이 몇 차례 있자 주민들은 마을에 경찰이 들어오면 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피신하곤 하였다. 사건이 나던 날 백암동마을에는 젊은 청장년들이 좌익과 경찰 양쪽으로부터 피신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남철·박만철 형제의 동생인 박정기(당시 18세)는 “당시 낮에는 경찰이 있었지만 밤에는 밤손님이 다니던 때다. 경찰의 포위작전이 간혹 있어서 형들은 위험한 나이 때라 아래쪽 마을 백암동마을에 방을 얻어서 지내고 있었다. 그날 아침 형들은 백암동 집에 있다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 문 앞에서 사살되었다. 사건이 있던 날, ○○○은 영암경찰이었던 친척 ○○○이 살려주어 다행히 목숨을 잃지 않았다며 경찰이 백암동마을에 나쁜 사람들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백암동마을을 포위하였고 ‘백암동에서 얼굴 반듯한 놈들은 다 죽이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나는 그날 서호정마을에 있었는데 아침에 경찰들이 서호정 주민들을 다 나오라고 해 50~60명의 주민들을 신근정 사거리에 집합하였다가 오후가 되어서 풀어주었다”고 진술하였다.1)

백암동마을 참고인 ○○○(당시 21세)는 “백암동하고 한 1km 떨어진 서호정마을 박남철·박만철 형제가 전날 저녁에 우리 마을에 와서 자고 그날 아침에 집에 가려고 했는데 경찰이 이들을 문 앞에서 한꺼번에 죽였다. 우리 집과 200미터 떨어진 곳이라 나도 그 총소리를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서호정마을 참고인 ○○○(당시 23세)·○○○(당시 21세)·○○○(당시 9세)도 박남철·박만철 형제가 그날 백암동마을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당시 21세)에 의하면 백암동 주민 김사현이 이들 형제가 사살된 곳과 50미터 떨어진 곳에서 경찰에게 붙잡혀 사살되었고 참고인 ○○○(당시 21세)·○○○(당시 18세)에 의하면 백암동 주민 이길룡과 나락을 지고 가던 오병환도 마을에서 경찰에게 붙잡혀 사살되었다고 한다.2)

몇 번의 총성이 울리고 난 뒤 경찰은 2~3인씩 짝을 지어 백암동마을을 수색하였고 백암동 주민 30여 명을 마을 앞에 집합시켰다.3)경찰은 이 중 서구림 신흥동 마을 조영우를 사살하였다고 한다.

당시 마을 앞 도로에 불려나와 현장을 목격한 ○○○(당시 21세)는 “백암동은 외지고 낙후된 곳이라 밤손님이 더러 오기도 했다. 그런데 밤손님들이 마을에 숨었다는 정보가 있었던지 새벽에 경찰이 마을을 포위하고 총소리가 몇 번 나더니 집집마다 다니면서 다 나오라고 해서 마을 앞으로 나갔다. 대중이 다 모인 앞에서 이상옥 형사4)카빈으로 조영우를 가리키며 ‘어제 잡은 것을 놓아주었더니 또 만났다’고 말하자 조영우가 뒷걸음질 쳤다. 이상옥 형사가 카빈을 쏘자 조영우가 골창에 떨어지더니 죽어버렸다”고 진술하였다.

조창근(당시 9세·조영우의 아들)은 “숙부 ○○○가 입산하자 경찰에게 시달리는 것이 두려웠던 아버지는 가족까지 위험할까봐 백암동마을에 방을 얻어 놓고 그곳에서 잠을 잤다”고 진술하였다.

조영우의 희생경위에 대해 서호정마을 참고인 ○○○·○○○의 진술이 일치하였다.

경찰은 모여 있던 주민 중에서 노인은 돌려보내고 ○○○, 박소동 등 젊은 사람들을 추려내어 경찰서로 연행하였다. 박소동은 경찰서에서 구타·고문 끝에 연행 이틀 만에 사망하였다. 그날 경찰서로 연행되었던 ○○○는 “영암경찰서로 끌려가 1주일가량 빨갱이와 손잡았냐며 고문·구타를 당했다. 한 것이 없었지만 너무 맞아 도로파괴를 했다고 말했다. 그 일로 재판을 받고 목포형무소에서 3개월간 수감되었다 풀려나왔다. 경찰서에서 이상옥 형사를 포함해 경찰 2~3명이 우리를 교대로 하나씩 조사했는데 사과나무로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그날 나와 함께 연행되었던 박소동은 강진군 칠량면 출신으로 아는 것도 없고 그저 일밖에 몰라 농사만 짓던 사람인데 몽둥이로 맞다가 결국 이틀 후에 간이 떨어져서 죽었다. 내 친구 김상만도 그날 연행되어 너무 매를 맞아 걸음도 못 걷고 당가로 실려 나갔는데 죽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고생을 많이 했다”고 진술하였다.

서호정마을 참고인 ○○○(당시 21세)도 “박소동은 그날 경찰에 연행되어 맞아 죽었다. 박소동은 미혼이었는데 유족을 찾을 수 없다”고 진술하였다. 박소동의 희생사실에 대해 참고인 ○○○·○○○의 진술이 일치하였다.

한국경찰대 일일 적동향 보고서에는 “1950년 12월 5일 오전 11시경 영암경찰은 영암면 학송리에 침투한 적을 추격하여 도답사(도갑사의 오기) 부근에서 무장한 적 80명을 발견, 교전하여 적 20명을 사살하였다”고 기록돼 있다.5)이날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 부근에서 경찰의 토벌작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백암동마을과 도갑사는 6km 떨어진 곳이다. 토벌작전 중이던 경찰은 작전 지역 부근인 서구림리 백암동과 서호정지역을 수색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인과 유족들은 오병환, 이길룡은 백암동 주민이었고 인근 주민 역시 입산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 있었으나 위험한 나이의 젊은이들이라 백암동마을로 피신해 있었는데 경찰은 이들의 혐의를 조사하지 않고 마을에서 눈에 띄는 대로 총격을 가해 이들이 희생되었고 마을 앞에 집합하였던 조영우를 주민 앞에서 사살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박소동은 경찰 명령대로 집결하였는데 경찰서로 연행된 후 구타·고문으로 사망한 것으로 판단된다.

백암동 사건 때 박남철, 박만철, 이길룡, 오병환, 박소동, 김사현 등 7명이 희생되었다고 거명되었으나 백암동마을은 당시 새롭게 조성된 이른바 ‘신촌’으로 농장에서 일하고자 외지에서 갓 이사 온 주민들이 많았는데 이길룡, 박소동, 오병환, 김사현 등은 이러한 이유로 이들이 사망하자 가족들이 다시 외지로 나가버려 유족을 찾을 수 없었고 이길룡을 제외하고는 제적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박만철의 제적부에는 “1952년 10월 17일 사망”, 박남철의 제적부에는 “1951년 7월 16일 사망”으로 기재돼 이들의 실제 사망일과 일치하지 않았다. 이길룡의 제적부에는 “1975년 11월 1일 사망”으로 기재돼 연도는 다르나 날짜는 실제 사건발생일(음력 10월 26일)과 4일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조영우, 박남철, 박만철 등 3인의 시신은 수습되었고 이들의 제사일은 음력 10월 25일로 확인되었다.

조사결과 이 사건의 희생자로 확인된 진실규명대상자는 조영우, 박남철, 박만철, 이길룡, 박소동 등 5명이고 제주도 출신으로 알려진 오병환은 유족과 제적부 확인을 할 수 없어 이 사건의 ‘추정’ 희생자로 분류하였다. 신청되지 않았고 신현소 외 참고인을 찾을 수 없었던 김사현은 희생자에 포함하지 않았다.

다음에 계속


1) “방에 있던 작은형을 끄집어내어 죽이려 하자 큰형이 뛰어나와 이를 말렸다고 한다. 경찰은 ‘네가 뭐냐’며 머리골에다 바로 총을 쏘아버렸다고 이를 목격한 백암동 주민에게 들었다.” 참고인 박정기 진술조서(2008.5.20)
2) 참고인 ○○○ 진술조서(2008.5.20); 참고인 ○○○ 진술조서(2008.5.20); 참고인 ○○○는 사건 당일 영암경찰서로 연행, 목표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3개월 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이길룡과 오병환이 마을에 없었다며 자신의 처로부터 사건 당일 이길룡도 사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 진술조서(2010.4.20)
3) 같은 날 백암동뿐만 아니라 서구림리 신흥동, 남송정, 서호정 주민들도 신근정 사거리에 집합되었으나 희생자는 없었다고 한다. 참고인 ○○○ 진술조서(2010.4.20); 참고인 ○○○ 진술조서(2008.5.20); 참고인 ○○○ 진술조서(2008.5.10)
4) 경기지방경찰청의 「경찰이력서 사본 요청 회신」에 의하면 이상옥은 1948년 영암서 사찰계에 근무하였고 1950년 10월 3일 전남 전투경찰대 영암서 전투중대 중대장으로 근무하였던 사실은 확인되었으나 사망하여 조사할 수 없었다. 경기지방경찰청, 「경찰이력서 사본 요청 회신」
5) 1950.12.10.보고된 원문이다. “051100, Police discovered 80 fully armed in the vicinity of TOTAB Temple while pursing the enemy who had infiltrated into HAKSONG-NI, YONGAM-MYON and engaged them; killing twenty(20) enemy, capturing two(2) Prisoners, ten(10) Carbines, two(2) 38-type Rifles, two(2) Russian Rifles, six(6) Hand Grenedes, and three(3) Mal of Rice.”; 이 외에 1950년 12월 5일 영암경찰서 부대가 공비소탕작전을 벌인 기록은 2건이 더 있으나 복사 상태가 나빠 정확한 지명을 확인할 수 없었다. 1950년 12월 6일 월출산 정상 후미 부분에서 적 30명을 공격, 적 17명을 사살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들 기록은 다음과 같다. “50.12.05. 8시경 40명의 대마 경찰서 대원들은 oo면 oo구송(궁성)산에 있는 병력을 알 수 없는 적과 교전하였다. 적 5명 사살, 38구경 소총 1개, 상당한 양의 탄약을 획득하였다.”; “50.12.05. 5시경 영암경찰서 부대장의 지휘아래 30명의 경찰이 oo면oo 마을에서 병력미상의 공비와 교전하였다. 적 15명(그중 3명은 여성) 사살, 포로 3명, 사제 소총 9정, 단검 9정, 창살 4정, 의류 상당분.”; “50.12.06. 새벽에 경찰은 월출산 정상 후방에 집결한 적 30명을 공격하여 적 17명 사살, 칼빈 소총 5정, ○○ 7개, 쌀 1말을 노획하였다.”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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