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마을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2) #08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
| 2025년 08월 22일(금) 10: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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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동구림리 조여순·최규관 등 5인 희생사건
1951년 1월 중순 유엔군은 중공군에게 밀려 37도선(단양) 부근까지 후퇴하였다.1) 이와 관련 당시 영암경찰서 소속 의경이었던 ○○○(당시 17세)은 “자수하면 살려주었는데 중공군이 내려온다고 할 때 다시 데려다 죽인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1951년 1월 19일 구림 주민 조여순과 조여순의 딸, 최규관과 형수 오광례, 이정동 등이 경찰에게 연행된 후 영암읍 대신리 삼거리 부근에서 사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동구림리 동계마을 참고인 ○○○(당시 27세)·고산마을 참고인 ○○○(당시 26세)·최주호(당시 19세·조여순의 조카)는 “조여순은 친정관계로 해서 인민군 점령기에 밥이나 해주고 연락 등 심부름을 하는 정도였다. 그 일로 조여순은 어린 딸(출생 미신고)과 함께 경찰에게 끌려가 죽었다”고 진술하였다. 동구림 고산마을 참고인 ○○○(당시 24세)은 “조여순은 친정이 미암면인 일반 가정주부인데 경찰이 진주할 무렵 경찰에게 죽었다고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서구림리 신흥동마을 참고인 ○○○(당시 22세)는 “최규관은 당시 40대로 일제 때부터 독립운동2)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인민군점령기에 농민위원을 했던 것 같다. 자수를 했는데 경찰이 데려다 죽였다. 최규관의 큰형수 당촌댁(오광례), 남송정 최상호의 모친(이정동)도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진술하였다.
서구림리 서호정마을 참고인 ○○○(당시 12세)은 “최규관이 지서에서 포박을 당한 채 경찰한테 끌려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경찰서로 넘기는 거였는데 이틀인가 며칠 뒤에 죽여버렸다고 한다”고 진술하였다.
동구림리 동계마을 참고인 ○○○(당시 27세)은 “최규관과 최규관의 형수(오광례)는 조여순 모녀와 같은 장소에서 경찰에게 살해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최규관의 아들 최동호(당시 16세)는 “부친과 백모(오광례)3)는 1951년 1월 19일 덕진면 영보리 야산에 있는 방공호에서 경찰에게 총살되었다. 그날 남송정마을 최상호4)의 모친(이정동)과 조여순 모녀가 같이 희생되었다. 부친과 백모, 최상호의 모친은 모두 사상문제로 경찰에게 끌려가 죽은 가족이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이정동의 손자 ○○○(당시 6세)은 “들은 이야기로는 조모가 영보에서 여러 명과 함께 희생되었는데 조부가 그곳에 임시로 매장하였다고 한다”고 진술하였다.
동구림리 고산마을 참고인 ○○○(당시 31세)는 “사촌누나가 최상호라고 독립운동을 했고 지식이 많은 사람과 결혼했는데 누나 부부와 시모(이정동) 모두 경찰에게 살해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최규관의 아들 최동호와 오광례의 아들 최경호는 ‘제사일은 음력 12월 11일’이라고 진술하였으며 조여순, 최규관, 오광례의 족보에는 ‘경인년 12월 12일(양력 1951년 1월 19일) 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소에 대해서는 동구림리 참고인 ○○○(당시 27세)과 ○○○(당시 19세)는 ‘영암읍 역리 여자중고등학교 자리’였다고 진술한 반면, 서구림리 참고인 ○○○(당시 16세)와 ○○○(당시 22세)는 ‘덕진면 영보리 야산에 일제강점기에 파놓은 방공호’라고 진술하였다.
오광례와 최규관의 시신을 수습하였던 오광례의 아들 최경호(당시 19세)에 따르면 이들 지역은 동일한 장소로 추정된다.
“내가 어머니(오광례)와 숙부(최규관)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영암에서 왼쪽으로는 덕진면 영보 가는 길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장암리로 빠지는 삼거리 부근 방공호이다. 시신이 몇 백 명이 있었다. 이리 젖히고 저리 젖히고 힘들게 찾았다. 어머니는 돈주머니로 숙부는 구레수염으로 확인했는데 옷과 시신이 부패되어 있었다.”
참고인과 유족에 의하면 오광례와 이정동 등은 좌익혐의 또는 부역혐의로 한국전쟁 이전과 발발 이후 경찰에게 죽은 가족이 있었다. 또한 최규관의 경우 인민군점령기에 부역을 하였다고 자수한 상태였고 조여순도 인민군점령기에 ‘밥이나 해주었을 텐데 협조했다고 해서 끌려갔다’고 한 진술로 보아 경찰은 수복 이후 부역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부역혐의자로 판단하여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부역혐의 내용이 무엇인지, 가족의 부역사실 때문에 이들이 대신 죽은 것인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찾지 못했다. 다만 이 사건의 희생자로 확인한 5명 중 최규관을 제외하고 4명 모두 여성으로 5세 이하의 유아, 50대 이상 2명, 20세의 주부였다는 점과 최규관을 포함, 이들이 적법절차를 받고 처형되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조사결과 확인된 이 사건의 희생자는 조여순, 조여순의 딸, 최규관, 오광례, 이정동 등 5명이다.
서구림리 최두호·최선호 희생추정사건
1951년에 들어서 군경의 토벌작전과 수복 지역에서의 부역자 색출이 본격화되자 금정면 국사봉과 장흥군 유치면에는 피난민뿐만 아니라 지방 좌익, 빨치산이 몰려들었다. 이에 대해 ‘비상경비사령부’는 3차에 걸친 ‘전국잔비섬멸기간’을 설정하였고 제1차 잔비섬멸기간인 1951년 3월 1일부터 4월 10일까지는 치안력이 미치지 않는 미수복지역의 완전수복에 목표를 두고 작전을 독려하였다.5) 1951년 3월 국사봉에서는 경찰의 5개 군 합동작전이 계속되었다.
최선호의 동생 ○○○(당시 22세)는 “최두호는 영암군당 간부였다. 형 최선호는 시종면 당책으로 활약하다 금정면으로 피난을 나갔다”고 진술하였고 최두호의 사촌인 ○○○(당시 16세)는 “최두호는 인공 후퇴 당시 부대를 조성해서 금정면으로 들어갔다”고 진술하였다.
1951년 3월 경찰의 금정면 지역 토벌작전이 본격화되면서 이들은 경찰에게 생포되어 영암경찰서로 연행된 이후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다.
최선호의 동생 ○○○(당시 22세)는 “나는 1950년 12월경에 자수를 한 뒤 경찰을 따라 토벌을 다녔다. 당시 경찰서장은 김성도였다. 1951년 봄에 영암경찰서에서 형 최선호, 최두호가 생포되어 붙잡혀온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이들이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몰라 형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고 진술하였다.
최두호의 사촌 ○○○(당시 19세)는 “최선호와 최두호는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위험하니까 금정면으로 피신해 있었는데 경찰에게 잡혀서 영암경찰서로 연행되었다. 1951년 2월경이었다. 최두호의 외숙이 지주로 경찰과 가까웠는데 그 사람을 통해 최두호를 살리려고 나도 당시 어려운 처지였지만 최두호와 면회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결국 살리지 못했다. 최선호도 비슷한 시기에 붙잡혀 영암경찰서로 연행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최선호의 제적부에는 ‘1951년 2월 16일 사망’으로 기재돼 있는데 이는 양력으로는 1951년 3월 23일이다. 최두호의 제적부에는 ‘1976년 2월 21일 사망’으로 기재돼 연도는 다르나 날짜는 최선호와 5일 정도 차이가 있어 이들이 이 무렵 연행되어 사망하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국사봉 토벌작전 중 이들을 생포한 경찰은 이들의 부역혐의를 알아내고 이들을 처형하였으리라 추정되나 이들이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는 기록은 찾지 못했다.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으나 이들이 영암경찰서에 구금된 것을 목격한 목격자(○○○·○○○)의 진술이 있어 최선호, 최두호를 ‘추정’ 희생자로 판단하였다.
다음에 계속
1) 길광준, 사진으로 읽은 한국전쟁, 예영커뮤니케이션, 2005, 247쪽.
2) 참고인 ○○○ 진술조서(2008.5.20); 동아일보 1932년 6월 17일자 ‘영암농민데모사건, 50여명을 검거’ 최규관이 이 사건과 관련 1933년 6월 22일 예심 회부, 1933년 9월 15일 1심에서 무죄 석방되었다. 박찬승, 「20세기 전반 동성마을 영보의 정치사회적 동향」 지방사와 지방문화 6권 2호, 역사문화학회, 2003.
3) 참고인 ○○○에 의하면 오광례의 장남 최택호는 전주형무소 수감 중 전쟁이 나자 후퇴하는 경찰에게 죽었고 이 일로 인민군점령기에 유가족으로 활약한 며느리도 수복 이후 경찰에게 죽었다고 하며 삼남 최영호도 한국전쟁 이전에 경찰에게 붙들려가 죽었다고 한다. 참고인 ○○○ 진술조서(2008.5.22)
4) 박찬승, 「20세기 전반 동성마을 영보의 정치사회적 동향」 지방사와 지방문화 6권 2호, 역사문화학회, 2003; 영암건준위에 참여한 최상호는 일제 때 부면장을 지냈고 1932년 농민회와 소작쟁의 등으로 2년형을 받았다. 최상호는 한국전쟁 전 피살되었다. 영암군지편찬위원회, 영암군지상, 1998, 332~336쪽; “남송리 최상호의 처가 전쟁 발발 전에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경찰에 죽었고 최상호도 전쟁 전에 사상문제로 경찰에 잡혀가 죽었다고 한다.” 참고인 ○○○ 진술조서(2008.5.22); 참고인 ○○○ 통화보고서(2009.4.22.); 안종철, 광주전남 지방현대사 연구-건준 및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울아카데미, 1991, 110쪽.
5) 국방부, 한국전쟁사 5 , 1971, 927, 936~937쪽.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