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人] 종갓집 종손이 광장의 투사가 된 이유 정철 고압송전선로 철탑 건설 반대 영암군대책위원장 인터뷰 선호성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5년 11월 07일(금) 10:56

▲ 정철 고압송전선로 철탑 건설 반대 영암군대책위원장

서두: 새벽의 일과

새벽 5시. 영암군 금정면 안노리의 어둠이 채 걷히기 전, 정철(60)은 이미 밖에 나와 있다. 첫 일과는 담배 한 대. 그리고 집 주변을 한 바퀴 돈다. “저녁에는 엄청 빨리 자버리니까” 새벽 시간이 그의 하루다. 유튜브를 보고, 기사를 읽고, 또 유튜브를 본다.

평범한 농사꾼의 아침 같지만, 그의 스마트폰에는 ‘고압송전선로 철탑 건설 반대 영암군대책위원회’ 단톡방이 쉴 새 없이 울린다. 지난 9월 5일, 금정면사무소 간담회에서 당시 면장에게 “아줌마”라고 한 발언으로 모욕죄 피소를 당한 후, 영암군 공무원 500여 명이 그의 처벌을 바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용서가 안 돼요. 정말로 용서가 안 된다고.”

그날 밤 9시, 잠이 든 그를 깨운 전화. “공무원들이 탄원서 냈는데 잘 대처했나 보다. 변호사 김앤장 샀어?” 친한 사이의 짓궂은 농담이었지만, 그 전화로 탄원서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새벽 1시까지 전화를 받아야 했다. 민간인들, 아는 사람들, 공무원들까지.

“농민회장 2년 하면서 그 측근들이 온통 나를 악마화시켜 버렸으니까. 악마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어차피 그전에도 말로만(주둥아리로만) 계속 그렇게 불렀으니까.”



1부: 종갓집 종손, 한량이 되고 싶었던

기자가 “회장님의 철학이 뭐냐”고 묻자, 그는 한참을 생각했다.

“철학이요? 철학…”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내 철학이 뭐냐면… 나 잘되는 꼴을 못 본 사람이야. 본인이 잘되는 꼴 못 보는 사람.”

스스로도 놀란 듯했다. 철학을 묻는 질문에 이런 자조적 대답이 튀어나온 것이. 하지만 그게 가장 솔직한 자기 정의였는지도 모른다.

정철은 금정면 종갓집 종손이다. “종갓집 종손이라고 원래 싸가지가 없어”라며 자조하지만, 그 ‘싸가지 없음’은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의 다른 표현일지 모른다.

고등학교 때는 밴드를 했다. “음주가무에 엄청나게 끼가 있는 사람”이었다. 노래도 잘했고, 술도 “어마어마하게” 먹었다. “한량기가 많아요. 사실은 한량기가 많다고.”

농협에서 3년 9개월을 일했지만, 결국 농사로 돌아왔다. 후회는 없다고 했다. 오히려 “상당히 선도적”이었다. 남들이 열 몇 마지기 지을 때, 임대차까지 해서 200마지기를 지었다.

그런 그가 ‘투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2부: 납골당에서 시작된 싸움, 800일의 기록

“금정면에 골프장, 납골당… 내가 청년회 상임부회장 2년, 청년회장 2년 하면서 4년 동안을 싸웠거든. 그때는 정말로 이 머리가 1cm 이상 길어본 적이 없어.”

그때 처음 알았다. 싸워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2020년 12월 3일, 농지 태양광을 막기 위한 1인 시위가 시작됐다.

2020년 12월 3일. 당시 정운갑 영암군농민회장(현 군의회 부의장) 시절 시작된 1인 시위. 정철은 부회장으로서 함께했다가, 2023년 회장을 맡으면서 이 싸움을 이어받았다.

“그때는 정운갑 현재 부의장, 그 양반 회장 때 12월달에 시작을 했었는데, 그때 나도 이제 영암군농민회 부회장이었으니까.”

영암군농민회 회원들이 돌아가며 영암군청 앞을 지켰다. 뜨거운 햇빛과 몰아치는 바람, 비와 눈 속에서도. 공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4년간.

시종, 미암, 삼호의 농지 한복판에 들어서려던 태양광 발전소들이 하나둘 포기했다. 변전소와 송전철탑 건설 계획도 미뤄졌다. 800일의 끈질긴 외침이 만들어 낸 조용한 승리였다.

2024년 12월 10일, 정철이 회장으로 있던 영암군농민회는 800회를 끝으로 1인 시위를 마무리했다. 정운갑이 시작하고 정철이 마무리한 4년의 대장정이었다.




3부: 2024년 가을, 삭발의 이유

2024년 8월 말, 큰딸이 결혼했다. 그리고 9월 10일, 그는 군서면 들판에서 머리를 깎았다. 80kg당 17만 5천 원으로 폭락한 쌀값에 항의하는 삭발이었다.

“우리 큰딸이 ‘농민회장은 머리 깎는다던데, 나 시집가 버려야 되겠네. 아는 척 안 해야 되겠네.’라고 했어.”

딸은 “머리 깎으면 결혼식장에 안 데려간다”고 빌었다. 아내는 “비싼 가발을 사자”고 무마했다. 그래도 그는 깎았다. 그리고 농민단체 대표 3인의 삭발과 함께 논 2000㎡를 갈아엎는 대규모 항의가 이어졌다.

삭발로 시작된 쌀값 투쟁은 겨울까지 이어졌다.

12월, 전봉준 투쟁단에 합류해 트랙터를 몰고 서울로 향했다. 한 번 내려왔다가, 유튜브에서 동료들이 잡혀갈 위기를 보고 새벽 3시에 다시 올라갔다. 남태령에서 경찰 차벽에 28시간 막혔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저녁이 되자 어린 청년들이 ‘지하철이 끊기면 우리는 갈 수 있지만, 농민분들만 남아 잡혀가실 수 있다’며 밤을 새워 농민들을 지켰다.

2030 여성들이 추위 속에서 자신들을 지켜주던 그 순간. 차벽이 열리던 순간, 그는 울었다.

“정말로 다 우리 딸이여. 우리 딸들 또래. 전부 다 오들오들 떨고 있었는데… 진짜로 얼굴에 빛이 나더라고.”



4부: 123일의 겨울, 계엄에서 파면까지

밤 10시 20분. TV에 윤석열 대통령이 나타났다. 비상계엄.

“미친놈이 계엄했대.” 아내가 말했다.

“계엄? 장난하냐?”

친구가 농담처럼 던진 말이 떠올랐다. “윤석열이 사고 치면 형님 1번이여. 영암서 나 형님 따라다녀야 돼.” 머리가 쭈뼛 섰다.

윤석열퇴진 영암행동 상임대표로서 그는 123일을 싸웠다. 2025년 1월 15일, 대통령이 체포되던 날, 그는 케이크를 준비했다.

“맹숭맹숭해서 케이크 사라고 했지.”

그는 멋쩍게 웃었다.

한남동 투쟁의 상징인 은박담요를 나눠주며, 영암 군민들과 ‘첫 번째 승리’를 자축했다. 그리고 4월 4일,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선고를 군청앞 광장에서 함께 들었다.

전국 군(郡) 단위에서는 처음으로 윤석열 탄핵을 외쳤던, 영암행동을 이끈 그가, 가장 뿌듯했던 기억이었다.



5부: 송전선로, 2년간의 은폐

2025년 9월 4일 오후. 동네 커피숍에서 한 주민이 황당한 얘기를 전했다. 보험 조사차 들른 커피숍에서 이장단장과 한전 직원이 주민설명회를 논의하는 걸 우연히 들었다는 것이다.

“황당했죠. 정말 황당했죠.”

345kV 송전선로가 금정면을 관통한다. 2023년 4월부터 진행된 사업인데, 주민들은 2년 후인 9월에야 알았다.

한전은 나중에 80회 협의했다고 주장했다. 내부 보고서를 보면 금정면에서만 이런 ‘협의’들이 있었다.

7월 30일, 금정면 입선위원 협의

8월 13일, 금정면장 및 입선위원 협의 (경과대역 설명)

8월 25일, 금정면 자문위원 위촉

특히 8월 13일, 한전이 금정면장과 입선위원들에게만 경과대역을 설명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반 주민들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면장과 몇몇 이장들만 아는 ‘깜깜이’ 진행이었다.

“나하고 통화를 했어도 설명회고, 입지선정위원하고 얘기했던 것도 설명회고,” 정철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실제 주민 대상 공개 설명회는 10월 14일과 29일 단 2회. 그마저도 대책위의 항의로 무산됐다.

“2년간 깜깜이로 추진하다가 주민이 알게 되니 뒤늦게 설명회를 연 것.” 대책위의 비판은 정확했다.

송전선로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는 금정대봉감대책위 집행위원장이기도 하다.

20여년 넘게 요구해 온 ‘일소피해 낙과 보상’이 사실 2017년부터 약관에 있었다는 충격적 사실을 밝혀냈다. 보험사가 “나무에 달린 과실만 인정한다”는 왜곡된 매뉴얼로 농민들을 속여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암군의 지원마저 줄었다.

도의원 시절 대봉감 농가와 함께 고민했던 현 군수가, 군수가 된 후 보험료 지원(50%→0%)과 열상팬 예산(7억 6천 원) 등을 삭감했다.

“본인이 도의원 하면서 그땐 산림청 주무관들 다 나하고 연결해 준 사람이었어…딱 군수 되니까 바뀌어버렸어.”



6부: “아줌마” 발언, 그리고 500명의 탄원서

송전선로 간담회. 금정면장이 계속 말을 이어가자 정철이 끼어들었다. 면장이 “어디 면장이 말하는데 끼어드냐”고 제지했다. 두세 번 반복되자, 그는 “아줌마”라고 했다.

“너무 열받아서 한 말. 너무 화가 나서…오죽했으면 그랬겠나.”

모욕죄로 고소당했다. 그리고 영암군 공무원 500여 명이 탄원서를 제출했다. 자치행정과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정황도 확인됐다.

“농민회장 2년을 하면서 원체 그 측근들이 악마화를 시켜버리니까… 근데 자기들이 그런다고 해도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악마가 된 적이 없어.”

들어본 적도 없는 모 매체의 기자한테 전화가 왔다.

“위치에 있을 만큼 있으신 분이 아줌마라는 심한 말을 하면 되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답했다.

“내가 아줌마라고 한 것은 잘못됐지. 그러나 내가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해.”


에필로그: 영암 사람, 정철

기자가 물었다. “정철이라는 사람, 스스로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투사 아닙니다. 그냥 영암 사람. 어찌어찌 하다 보니 투사가 된 거고…”

그는 10년 후 영암은 어떨 것 같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정말로 사람들이 내려와서 편하게 사는 동네였으면 좋겠어. 금정이라는 동네가 쇠 금(金)자에다가 우물 정(井)자라 금이 많다는 동넨데… 영암 자체가 편안했으면 좋겠어요.”

간혹 그의 투쟁을 보고 “의원 출마하려나” “정치하려고 그러나”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화를 낸다.

“정치 쪽으로는 아예 관심도 없고, 그런 얘기가 들리면 오히려 화가 나요.”

많은 활동가들이 지역 의원이나 정계 입문을 위한 발판으로 삼는다는 걸 그도 안다.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본인은 그런 일 절대 없다고. 절대.

손사래를 쳤다.

“이런 활동, 언제까지 하실 것 같아요?”

“그만해야 된다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불의를 보면 못 참는 게 있고, 남들이 힘들어하는 거 보면 못 참는 게 있어가지고.”

말끝을 흐렸다가 다시 이었다.

“못 벗어날 것 같아. 못 벗어날 것 같아…”

또 멋쩍은 듯 웃어넘겼다.


오늘도 새벽 5시, 정철은 일어난다.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우고, 집 주변을 한 바퀴 돈다. 송전선로 반대 대책위원장으로서의 하루가 또 시작된다.

한량이 되고 싶었던 종갓집 종손은, 오늘도 불의와 싸우는 ‘영암 사람’으로 살아간다. 정치적 야심도, 개인적 영달도 없이. 그저 농민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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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정체성이나 인격은 그가 하는 말로도 알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말은 거짓일 수도, 포장일 수도 있다. 그래서 기자는 그의 삶의 궤적을 좇았다. 지난 2년여간 그가 걸어온 길, 그가 선택한 행동들을 지켜봤다. 800일의 1인시위, 삭발과 논 갈아엎기, 남태령의 28시간, 123일의 촛불… 그 모든 순간들이 보도기사에 담겼다. 이 기사는 그가 고소당한 모욕죄 혐의의 가부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 행동의 기록을 통해 ‘진짜’ 정철이 누구인지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사랑하는 금정면을 위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나서서,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키려 했고, 생존을 위해 얻어내고자 하는 것을 얻고자 했던 한 사람. 정치적 야심조차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면서도, 농민들과 주민들을 위해 싸워온 사람. 말이 아닌, 삶의 궤적이 증명하는 한 인간의 진실. 그에게 부끄러운 역사가 있다면 이런 기사는 쓰지 않았을 것이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