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의 기다림, 진실을 향하여 (2)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3) #01
1950년 영암면, 그해 가을의 기록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5년 12월 05일(금) 12:46

위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영암면 남풍리 박○태, 박○애 희생 사건(2다-3427)

진실규명대상자 박○태(朴○台, 이명 박○대, 남, 42세, 영암군 장학사), 박○태의 여동생 박○애(朴○愛, 여, 18세, 영암중학교 학생)는 영암면에 거주하던 중, 1950. 10. 14.(음력 9. 4.), 박○태의 남동생이 좌익활동을 하다 입산하였다는 이유 등으로 영암면 남풍리와 교동리 경계에 있는 야산에서 경찰에게 총살되어 희생되었다.

신청인 박○순(박○태의 아들, 1937년생)의 진술에 따르면, 박○태와 박○애의 본적은 영암면 남풍리 85번지로, 박○애는 아버지1), 어머니, 오빠 3명(박○○, 박○○, 박○○), 조카 박○○과 함께 본적지에서 거주하였고2), 박○태는 부인, 자녀 7명과 함께 영암면 서남리에 거주하였다.3)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인민군 점령기에 박○태의 남동생 박○○이 영암군 내무서에서 활동하였는데, 영암군이 경찰에 수복되자 박○○은 남동생 박○○, 조카 박○○을 데리고 영암군 금정면으로 입산하였다.4) 이후 남은 가족들은 광주로 피신하였는데, 박○태 가족과 박○애는 영암군에 남아, 박○태와 박○애는 회문리에 있는 작은 할아버지 집으로, 박○태의 부인과 자녀들은 영암면 서남리에 있는 부인의 친정집으로 피신하였다.1)

1950. 10. 6. 영암면이 경찰에 수복되었고, 10. 7.경 영암면 회문리 작은할아버지 집에 있던 박○태와 박○애는 그곳으로 찾아온 영암경찰서 경찰에 의해 영암경찰서로 끌려가 그곳에 감금되었다. 약 1주일이 지난 1950. 10. 14.(음 9. 4.) 오후, 박○태와 박○애는 영암경찰서에 갇혀 있던 20여 명과 함께 두 손이 줄로 묶인 채 끌려 나갔다. 당시 영암경찰서 부근 외갓집에 있던 신청인 박○순은 영암경찰서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끌려 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나가 보았고, 아버지 박○태와 고모 박○애가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하였는데, “제가 아버지를 보자마자 울면서 아버지를 부르자, 경찰이 저에게 집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저지해서 더 따라가지도 못했다.”라고 진술하였다.

다음날인 10. 15.(음 9. 5.), 신청인 박○순은 영암면 남풍리에 거주하던 작은 할머니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 작은할머니는 인맥을 통해 영암경찰서에서 끌려 나간 사람들이 영암면 남풍리와 교동리 경계에 있는 야산(일명 서운대)에서 총살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후 신청인 박○순은 어머니, 작은할머니, 인부들과 함께 사건 현장으로 가서 아버지 박○태와 고모 박○애의 시신을 수습하였고, 박○태의 시신은 영암면 학송리에 있는 선산에 매장하였다. 고모 박○애의 시신은 그날 그곳에 온 다른 희생자(미혼 남자, 이름 미상)의 가족들이 ‘영혼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수습해 갔다. 당시 현장에는 두 손이 줄로 묶인 채 머리에 총을 맞아 사망해 있는 시신 여러 구가 있었다고 한다.6)

진실규명대상자 박○태와 박○애는 박○태의 남동생 박○○이 인민군 점령기에 내무서에서 활동하다가 금정면으로 입산하였다는 이유로 희생된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인 하○○(이웃, 1933년생)의 진술에 따르면, 박○태와 박○애는 입산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영암경찰서 경찰에 의해 영암면 남풍리와 교동리의 경계 야산(일명 서운, 막운대미)에서 희생되었다.

신청인 박○순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부터 농협에서 근무하였는데, 채용된 이후 자신에 대한 신원조사 내용이 ‘본명의 부는 인민교원으로 활약하다 사살된 자이며 본명의 숙부 박○○은 빨치산 유격대장으로 부역하다가 자수한 자임’이고, 자신이 신원특이자로 관리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7) 박○순에 대한 신원조사 내용은 신청인의 여동생 박○○이 영암군 보건소 간호사로 채용될 때 진행된 신원조사 내용과도 일치한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박○○에 대한 신원조사 내용은 ‘본명의 부 박○대는 6.25 당시 인민학교 교사로 부역타가 경찰관에 사살당한 자’이다. 이 내용은 1968. 1. 15. 영암경찰서에서 작성한 박○○에 대한 「신원조사회보서」에 기재된 것으로, 이 기록은 1969. 영암군청 총무과에서 생산된 임용 관련 기록에 편철되어 있었다.

위 신원조사회보서에 기재된 박○○의 본적 ‘전남 영암군 영암면 남풍리 85’, 생년월일 ‘1950. 8. 15.’이 진실규명대상자 박○태와 신청인 박○순의 제적등본에 기재된 내용과 동일하여, 위 박○○은 진실규명대상자 박○태의 딸로 확인된다.8)

원조사 결과 중 기타 부분에 ‘본명의 부 박○대는 6.25 당시 인민학교 교사로 부역타가 경찰관에 사살당한 자’라는 내용이 확인되는데, 진실규명대상자 박○태의 한자 ‘태(台)’를 ‘대’로 읽기도 하여 ‘박○대’로 기재된 것으로 판단된다.

신원조사회보서에는 박○태가 ‘6.25 당시 인민학교 교사로 부역’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에 대해 신청인 박○순은 아버지 박○태가 한글학회 회원이었던 연유로 인민군 점령기 때 영암중학교에서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준 적은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박○태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신안군 임자보통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였고9), 해방 이후인 1947.에는 영암군 서호면 장천초등학교 교장으로, 1948.에는 군서면 구림초등학교 교장으로, 1949.에는 영암군 장학사로 근무하였다고 한다.10)

제적등본에는 박○태가 ‘1959. 6. 10. 본적지(전남 영암군 영암면 남풍리 85번지)에서 사망’, 박○애는 ‘1959. 8. 9. 본적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족보 『밀양박씨숙민공파(密陽朴氏肅敏公派)』에는, ‘○태(○台), 1950. 10. 13. 졸(卒)’로 기재되어 있고, 박○애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박○태의 제삿날은 사망 전날인 양력 10. 13.로, 박○태가 생전에 양력 중심으로 생활하여 제삿날을 양력으로 지내왔다고 한다. 박○애의 제사는 신청인의 집안에서는 지내지 않고 있다. 이에 제적등본 상 사망일은 상이하나, 족보와 제삿날을 근거로 박○태와 박○애의 희생일을 1950. 10. 14.(음력 9. 4.)로 판단하였다.

박○태가 ‘6.25 당시 인민학교 교사로 부역타가 경찰관에 사살당한 자’라고 기재되어 있는 신원조사회보서 내용, 박○태와 박○애가 경찰에게 연행되는 모습을 목격하고 이후 두 사람의 시신을 수습한 신청인의 진술, 신청인이 박○태와 박○애의 희생일을 1950. 10. 14.로 기억하고 있고, 그 전날인 양력 10. 13.이 박○태의 제삿날인 점, 족보에 기재된 박○태의 사망일이 1950. 10. 13.인 점, 박○태와 박○애가 입산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영암면에서 희생되었다는 참고인 하○○의 진술을 근거로 할 때, 진실규명대상자 박○태와 박○애는 1950. 10. 14.(음 9. 4.), 박○태의 동생이 좌익활동을 하다 입산하였다는 이유 등으로 경찰에게 끌려가 영암면 남풍리와 교동리 경계 야산에서 경찰에게 총살되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다음에 계속


1) 박○태와 박○애의 아버지 박○○은 일제강점기에 영암경찰서 경찰로 근무하다 이후 사법서사(司法書士, 현재의 법무사)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박○○은 박○태와 박○애가 경찰에게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인 1950. 11. 5.(음 9. 26.),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2) 박○○(1925년생)은 영암군청에서 근무하였고, 박○○(1928년생)은 영암중학교 교사였으며, 박○○(1930년생)은 영암중학교 5학년 학생, 박○○(1933년생)은 영암중학교 4학년 학생이었다.
3) 신청인 박○순은 아버지 박○태가 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는 동안에는 학교 사택에서 거주하였으나, 1949. 아버지가 영암군 장학사로 근무하면서부터는 영암면 서남리에 있는 병원에 딸린 주택 형태의 입원실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 병원의 의사가 외삼촌이었다고 한다.
4) 박○○과 박○○은 내무서에서 활동하지는 않았는데, 박○○과 함께 입산하였다고 한다. 금정면에 입산한 후 박○○은 유격대장으로 활동하다가 1950. 12.경 조카 박○○과 함께 자수하였고, 박○○은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신청인 박○순은 박○○의 행방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어 진실규명 신청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5) 신청인 박○순 진술조서(2022. 10. 28.) 당시 박○태는 부인과 자녀들이 있으니 자신은 영암군에 있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신청인 박○순 진술조서(2022. 10. 28.) 시신이 여러 구 있었다는 신청인의 진술로 보아, 본 사건의 희생자는 더 많았으리라 판단되나 현재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대상자 박○태, 박○애 외에 진실규명 신청된 사건은 없다.
6) 신청인 박○순 진술조서(2022. 10. 28.) 신청인 박○순은 농협에 채용되기 전에 공무원 채용시험에 응시하였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최종 합격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농협에서 근무하는 동안 승진에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없었고 1995. 정년퇴직하였지만, 항상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7) 신청인 박○순 진술조서(2022. 10. 28.) 신청인 박○순은 농협에 채용되기 전에 공무원 채용시험에 응시하였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최종 합격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농협에서 근무하는 동안 승진에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없었고 1995. 정년퇴직하였지만, 항상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8) 박○○은 실제로는 1949.에 출생하였다고 한다. 신청인 박○순 진술조서(2022. 10. 28.)
9) 『조선총독부 관보』 제3626호(1939. 3. 22.)에 게재된 소학교교원시험제2종합격자 명단에서 ‘전라남도 박○태(朴○台)’가 확인된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직원록』에는, 박○태가 1934. 전남 신안군 임자보통학교 촉탁교원(囑託敎員)으로, 1935~1937. 임자보통학교 훈도(訓導)로, 1938~1939. 임자심상소학교 훈도(訓導)로, 1940. 전남 강진군 대구심상소학교 마량간이학교에, 1941. 전남 강진군 대구국민학교 마량간이학교에 임명되었음이 확인된다.
10) 신청인 박○순 진술조서(2022. 10. 28.) 이에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규명대상자 박○태의 교장 등 재직사실을 확인하고자 관계기관에 협조 공문을 발송하였으나, 영암교육지원청에는 1950년 이후 자료만 보관하고 있어 관련 자료를 입수하지 못하였다. 전라남도영암교육지원청 교육지원과-16313(2022. 10. 27.)「조사 협조 요청 회신(교장 및 장학사 재직사실 확인 요청)」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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