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볕 아래, 멈춰버린 낫질(2)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3) #02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
| 2025년 12월 19일(금) 17: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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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덕진면 영보리 최○덕 희생 사건 (2다-2417-54)
진실규명대상자 최○덕(崔○德, 남, 17세, 농사)은 덕진면 영보리 356번지 냉천동마을에서 거주하던 중, 1950. 10. 하순, 냉천동마을에 있는 자신의 논에서 벼를 훑다가 최○덕을 빨치산으로 오해한 경찰에게 총살되어 희생되었다.
신청인 최○훈(최○덕의 조카, 남, 1957년생)의 진술에 따르면, 최○덕은 아버지 최○○1), 어머니, 남동생(신청인 최○훈의 아버지)과 거주하였는데,2) 1950. 10. 이후부터는 금정면에 있는 친척집으로 피난을 가 있다가 1950. 10. 하순 어느 날 낮,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덕진면 영보리 냉천동마을로 돌아와 자신의 논에서 벼를 훑다가 마을에 내려온 빨치산으로 오인받아 경찰에게 총살되었다. 최○덕의 시신은 마을 주민에게 발견되어 수습되었고, 최○덕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시신을 덕진면 영보리 산에 있던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최○덕이 미혼으로 사망하여 최○덕의 제사는 따로 지내지 않고 명절에 함께 지낸다.
참고인 정○○(이웃, 남, 1938년생)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덕진면 주민들이 금정면으로 피난을 많이 가서 논에 벼가 다 익었는데도 추수를 못 했고, 금정면으로 피난 간 사람들은 먹을 것이 떨어지면 마을로 와서 나락을 먹을 만큼만 훑어가곤 했다. 사건 당일, 금정면으로 피난을 갔던 최○덕도 먹을 것을 가지러 덕진면 영보리로 와서 논에서 나락을 훑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경찰이 최○덕을 빨치산으로 착각하고 총을 쏴버렸다. 그날 참고인 정○○은 아버지와 집에 있다가 논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나갔다가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고 사망해 있는 최○덕의 시신을 목격하였다.
참고인 정○○의 아버지는 최○덕의 시신을 수습한 후 가마니로 말아서 최○덕의 집으로 운반하였다.
최○덕이 거주했던 덕진면 영보리는 한국전쟁 이후 좌익활동가가 많은 지역 중 하나였고,3) 무엇보다 영보리는 금정면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금정면에 입산한 빨치산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그러한 지역적 배경에서 1950. 10. 6. 영암면이 수복된 이후, 영암면과 덕진면을 중심으로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행위를 했거나 빨치산 등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을 색출하던 경찰에게 덕진면 영보리는 주요 대상 지역이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경찰은 논에서 벼를 훑고 있던 진실규명대상자 최○덕을 빨치산으로 오인하고 총을 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제적등본에는 최○덕이 ‘1952. 7. 25. 본적지(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356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고, 족보 『전주최씨중랑공파세보(全州崔氏中郎將公派世譜)』에는 최○덕이 등재되어 있지 않다.4)
최○덕이 미혼으로 사망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고 족보에도 등재되지 않아 1950. 10. 하순 이외에 정확한 날짜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사건 당일 참고인 정○○이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고 사망한 진실규명대상자 최○덕의 시신을 목격하였고, 참고인의 아버지가 최○덕의 시신을 수습하여 최○덕의 가족들에게 전한 점, 참고인 정○○이 1950. 10. 벼를 수확할 무렵 최○덕이 희생되었다고 진술한 점을 통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최○덕은 1950. 10. 하순, 금정면으로 피난을 갔다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덕진면 영보리 냉천동마을에 있는 자신의 논에서 벼를 훑던 중 자신을 빨치산으로 오인한 경찰에게 희생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에 계속
1) 최○○은 일제강점기 때 소작쟁의를 하여 조사받는 과정에서 몸이 안 좋아져서 피난을 가지 않고 부인과 함께 덕진면 자택에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최○○(崔○○, 1901~1966)은 1932. 6. 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에서 청년회원 70여 명과 소작권 이동 방지를 협의한 후, 덕진면 운암리와 백계리 방면의 신구 소작인의 집에 들어가 소작권 이전의 부당함을 꾸짖고 응징한 후 ‘소작쟁의 만세’, ‘노동가’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다 체포되어 벌금 30원을 받았다. 2021. 국가보훈처는 최○○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대통령표창을 서훈하였다. 공훈전자사료관 홈페이지 참고(www.e-gonghun.mpva.go.kr)
2) 신청인은 아버지의 첫째 형 최○○은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행방불명되었고, 아버지의 누나 최○○은 남편과 함께 영암면에 거주하던 중 한국전쟁 때 사망하였는데, 자세한 사건경위를 알지 못하여 최○○과 최○○에 대해서는 진실규명 신청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3) 인민군이 영암을 점령하고 있을 시기 영암군의 주요 직위인 영암군 인민위원장, 내무서장, 덕진면 인민위원장은 모두 영보 사람들이 맡고 있었다. 박찬승, 「20세기 전반 동성마을 영보의 정치사회적 동향」, 『지방사와 지방문화』6, 2003, 19쪽
4) 족보에는 신청인의 아버지(최○○)만 등재되어 있다.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