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발은 언덕 위에, 한 발은 아래에 (2)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3) #06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
| 2026년 01월 23일(금) 1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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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사건 당일 참고인 이○○(유○동의 며느리, 여, 1929년생)는 유○동이 경찰에게 총살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1) 참고인 이○○는 그날 아침, 피난 가라는 마을 주민들의 소리를 듣고 시어머니 유○동, 시동생 양○하, 남편 양○○와 함께 피난을 나갔다. 유○동은 친척 언니 유○○과 함께 노노동마을 뒤 모시밭에 숨었고, 참고인은 그 맞은편에 굴처럼 파여 있는 곳에 숨었는데, 부근을 지나던 경찰들이 모시밭에 숨어 있는 유○동 등에게 나와서 영보국민학교로 가라고 했다. 하지만 유○동과 유○○이 나오지 않자 총을 쐈고, 그 와중에 두 사람이 총살되었다. 맞은 편에 숨어서 그 모습을 모두 목격한 참고인은 경찰이 돌아간 후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시어머니 유○동 등 2명의 시신 위에 흙을 덮어 놨다. 양○하 역시 모시밭 부근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게 총살되었다. 마을 뒷산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생존한 양○하의 형이 마을이 조용해진 후 내려와 양○하와 유○동의 시신을 수습하여 노노동마을에 있는 집안 땅에 매장하였다.2)
제적등본에는 유○동이 ‘1951. 2. 5. 전남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25번지에서 사망’, 양○하가
‘1979. 6. 25. 전남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273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족보 『제주양씨종박정공파보(濟州梁氏宗簿正公派譜)』에는 유○동이 ‘○흥(○興), 자(字) ○선(○先), 배(配) 유○동(兪○洞, 1950. 경인(庚寅) 9. 16. 졸(卒)’로 기재되어 있고, 양○하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3) 유○동과 양○하의 제삿날은 사망 전날인 음력 9. 15.이다. 이에 제적등본 상 사망일이 상이하나, 족보와 제삿날을 근거로 유○동과 양○하의 희생일을 1950. 10. 26.(음력 9. 16.)로 판단하였다.
사건을 직접 경험하고 유○동의 희생과정을 목격하고 이후 유○동과 양○하의 시신을 목격한 참고인 이○○의 진술, 유○동과 양○하의 시신이 수습된 점, 두 사람의 제삿날이 사망 전날인 음력 9. 15.인 점을 통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유○동과 유○동의 아들 양○하는 1950. 10. 26.(음력 9. 16.), 덕진면 노송리 노노동마을에 들어온 경찰을 피해 노노동마을 뒤편 모시밭과 그 부근으로 피신하였다가 경찰에게 총살되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다음에 계속
1) 참고인 이○○는 주민등록상 1926년생이나 실제로는 1929년생이고, 1947. 남편 양○○와 혼인하여 덕진면 노송리 노노동마을에서 살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현주소는 전남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235-4(전남 영암군 덕진면 노노동길 45)이다. 사건 당시 이○○는 임신 중이었고, 이후 태어난 아들이 신청인 양○규이다.
2) 참고인 이○○ 진술조서(2022. 3. 31.) 먼저 유○○이 목에 총을 맞아 희생되었고, 다음으로 유○동이 옆구리에 총을 맞고 희생되었다고 한다. 유○○에 대해서는 후손이 확인되지 않는 등의 이유로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되지 않았다.
3) 『제주양씨종박정공파보(濟州梁氏宗簿正公派譜)』권1, 2002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