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으로 간 사람들 (2)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3) #07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6년 02월 06일(금) 11:21

위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덕진면 덕진리 김○례 희생 사건(2다-2124-9)

진실규명대상자 김○례(金○禮, 이명 간○이, 여, 28세, 농사)는 덕진면 덕진리 345번지 신정마을에 거주하던 중, 1950. 10. 30.(음력 9. 20.), 신정마을 뒷산에서 빨치산과 연락하는 사람으로 의심받아 경찰에게 총살되어 희생되었다.

신청인 조○현(김○례의 손자, 남, 1969년생)의 진술에 따르면,1) 김○례는 덕진면 덕진리 신정마을에서 거주하던 중 마을에 들어온 경찰에게 총살되었다.

참고인 조○○(김○례의 딸, 여, 1939년생)의 진술에 따르면, 김○례는 시어머니, 남편 조○○, 자녀 3명과 함께 덕진면 덕진리 345번지 신정마을에 거주하였는데, 신정마을 중에서도 산 아래 위치한 곳에 있는 여섯 가구 중 한 집이 김○례의 집이었다. 1950. 10. 30.(음력 9. 20.) 오전, 산 아래 위치한 곳에 있던 여섯 가구 중 한 집과 김○례의 집에 불이 나자,2) 김○례는 자녀 3명을 데리고 불이 나지 않은 마을의 다른 집으로 피신하였다. 김○례가 피신한 집은 집에서 도보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집으로, 인민군 점령기 때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의 처갓집이어서 마을에서 ‘인민군 사위집’이라 불리는 집이었다. 김○례는 자녀 3명을 그곳에 두고, 불탄 집의 상황을 보기 위해 집으로 가는 도중 경찰을 만났는데, ‘인민군 사위집’에 들어갔다 나온 것을 보니 빨치산과 연락하는 사람이라고 의심한 경찰에 의해 마을 뒷산 언덕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총살되었다. 참고인 조○○은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 김○례가 경찰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하였는데, “그때가 12시나 됐을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 삼남매가 무서워서 ‘엄마’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따라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그날 마을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들렸다.” 라고 진술하였다.

당시 마을에서는 입산하지 않은 남자들이 밤이 되면 보초를 섰는데, 김○례의 남편도 전날 밤 보초를 서기 위해 갔다가 집에 오지 않았고, 김○례의 시어머니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무사하였다.

김○례의 남편은 사건 당일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날은 김○례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고, 며칠 후 시신을 수습하여 수습한 자리에 매장하였다.3)

진실규명대상자 김○례가 희생된 1950. 10. 30.(음력 9. 20.)은 영암군에서 빨치산에 의한 ‘2차 습격’이 발생했던 날이다. 이 날 금정면에 입산한 빨치산이 영암면, 덕진면을 습격하여 그 과정에서 경찰, 빨치산, 인근 마을 주민들이 희생되었다.4) 김○례가 거주했던 덕진면 덕진리 신정마을은 덕진면사무소 부근에 있는 마을로, 영암경찰서 및 덕진지서 경찰은 신정마을을 포함한 덕진리 부근에서 습격에 대비하고 있었으리라 판단된다. 그 과정에서 경찰은 김○례를 빨치산과 연락하는 사람이라고 의심하고 총살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제적등본에는 김○례가 ‘1969. 9. 19. 본적지(전남 영암군 덕진면 덕진리 345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족보 『한양조씨대보(漢陽趙氏大譜) 권5 한풍군파(漢豊君派)』에는 ‘○○(○○), 자(字) ○○(○○), 배(配) 김해김씨(金海金氏) 경인(庚寅) 9. 19. 졸(卒)’로 기재되어 있다.5) 김○례의 제삿날은 사망 전날인 음력 9. 19.이다. 이에 김○례의 희생일을 제적등본에 기재된 사망일자, 족보와 제삿날을 근거로 하여 1950. 10. 30.(음력 9. 20.)로 판단하였다.

사건 당일 김○례가 경찰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한 참고인 조○○의 진술, 김○례의 제삿날이 사망 전날인 음력 9. 19.인 점, 족보에 기재된 김○례의 사망일이 1950. 9. 19.인 점, 제적등본에 기재된 김○례의 사망일이 연도는 차이가 있으나 일자가 9. 19.인 점, 김○례의 시신이 수습된 점을 근거로 할 때, 진실규명대상자 김○례는 1950. 10. 30.(음 9. 20.), 덕진면 덕진리 신정마을 뒷산 언덕에서 자신을 빨치산과 연락하는 사람으로 오해한 경찰에게 총살되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위원회 조사 결과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1950년 10월 영암군 영암면과 덕진면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된 주민은 총 22명으로 확인됐다. 이 중 14명은 ‘덕진면 노송리 노노동마을 희생 사건’의 희생자였다.

희생자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경찰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피해 가족과 함께 피신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10세 이하 유아, 50대 이상 노인, 10대 및 50대 여성도 포함돼 있었다. 직업별로는 교사와 학생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농사와 가사에 종사하던 평범한 주민들이었다.

위원회는 이 사건의 가해 주체를 영암경찰서 및 덕진지서 소속 경찰과 그 지휘 아래 있던 의용경찰로 판단했다. 당시 영암경찰서장은 류기병(1950. 7. 18.~1951. 1. 18. 재임)으로 확인됐다. 다만 1950년 10월 당시 소속 경찰 명단 등 관련 기록을 찾지 못해 개개인의 신원은 확인할 수 없었다.

위원회는 “본 사건에 대한 1차적 책임은 관할 경찰서장에게 있으며, 공권력을 오·남용하거나 불필요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통제·예방하지 못한 국가에도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가해의 위법성에 대해 위원회는 “한국전쟁 전후 시기 부역자 등을 처벌하도록 규정한 법률이 있었으나, 이 사건 희생자들에게는 그러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비록 전쟁 중이라 할지라도 국가기관인 경찰이 비무장·비저항의 민간인을 법적 근거나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살해한 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과 적법절차 원칙,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명시했다.

다음에 계속


1) 신청인 조○현은 진실규명대상자 김○례의 아들 조○○의 아들이다.
2) 참고인 조○○은 그날 집에 불이 난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다.
3) 참고인 조○○ 진술조서(2022. 3. 30.) 참고인 조○○의 가족들은 집이 전부 불타서 그날 밤부터 당장 지낼 곳이 없어져서 마을에 있는 빈집(입산한 사람의 집)에서 지냈고, 나중에 덕진초등학교 건너편 마을로 이사했다고 한다. 김○례의 시신은 나중에 신북면에 있는 조씨 선산으로 이장하였다.
4) 「전라남도순직경찰관대장」에는 1950. 10. 30. 영암면, 덕진면 등지에서 순직한 경찰이 다수 등재되어 있고, ‘영암경찰서 제2차 습격 당시’ 순국하였다는 내용도 확인된다.
5) 『한양조씨대보(漢陽趙氏大譜) 권5 한풍군파(漢豊君派)』2005, 390쪽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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