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리 마당에 드리운 그림자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4) #01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
| 2026년 02월 27일(금) 11:29 |
![]() 위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 |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1950년 10월 6일 영암경찰서가 수복된 것을 시작으로 10월 16일에는 삼호면이, 10월 31일에는 도포면이, 11월 14일에는 학산면이, 11월 15일에는 덕진면이, 12월 15일에는 군서면이, 12월 24일에는 미암면이, 1951년 4월에는 금정면이 수복되었다.
가장 늦게 수복된 금정면에서는 산악지역의 빨치산과 토벌대 사이의 전투 과정에서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고, 영산강변에 위치한 서호면, 학산면, 미암면, 도포면 등지에서는 빈부 차이 등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해 지방 좌익에 의한 희생 사건이 다수 발생하였다. 특히 이 지역에서는 포구나 면소재지 등에서 인근의 다른 마을 주민들에 의해 피해를 당한 경우가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학산면에서는 많은 수의 현씨 일가가 좌익들에게 희생당했다. 학산면의 현씨 일가는 일제하 광주지역의 대지주이자 자본가(호남은행 설립자)였던 현○○ 일가였다. 이들의 경제적 부가 희생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씨 일가 집성촌인 학계리 광암마을 일대 땅이 거의 현○○ 소유였고,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 부유하다는 이유 등으로 희생당했다.
본 사건의 조사결과 가장 많은 희생 사건이 발생한 학산면 상월리는 ‘집이 크든 작든 집집마다 빨치산이 방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빨치산이 활발하게 활동한 지역이다.1) 상월리에서는 경찰 가족이자 부유하다는 이유로 노인, 여성, 아동을 포함한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기독교인 가족들도 다수 희생되었는데, 그리스도의교회 교인들은 1950년 11월 초 좌익들에 의해 여러 차례에 걸쳐 상월리 앞 하천으로 끌려가 희생당했다. 이곳에는 순교비가 세워졌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 발발 후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에서 발생하였다고 진실규명 신청된 사건을 희생 시기와 장소에 따라 18개의 사건으로 분류·병합한 후 기록과 진술조사를 통해 조사하였고, 그 결과 진실규명대상자 133명이 희생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학산면 용소리 희생 사건
조○구 희생 사건
진실규명대상자 조○구는 좌익에 반론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1950. 8월 초, 학산면 용소리 천해마을 앞 들판에서 지방 좌익에 의해 희생되었다. 가족과 마을 주민들이 조○구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진실규명대상자의 제적등본상 사망일은 1950. 9. 8.(음력 7. 26)이고, 제사를 지내지 않아 제삿날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정확한 일자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양력 8월 초 날씨가 몹시 더울 때’ 부친 조○구가 희생되었다는 아들의 진술을 토대로 사건 발생 시기를 1950. 8월 초로 판단하였다.2)
조○구의 아들 조○○(당시 10세)은 마을 주민들이 노거수(老巨樹) 아래서 쉬고 있을 때 마을마다 ‘공산당’을 홍보하며 다니던 좌익들이 인민기를 들고 용소리 천해마을에 들어오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좌익들에게 반론을 제기한 조○구는 당일 저녁 집으로 찾아온 좌익들에 의해 천해마을 앞 들판으로 끌려가서 죽창에 찔려 희생되었고 다음 날 가족과 마을 주민들이 조○구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를 치렀다.3)
조○구가 희생되고 며칠 뒤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좌익들이 조○구 집으로 찾아와서 조○구의 처 이○○, 아들 조○○과 조○중을 공회당 앞으로 데리고 가서 종을 친 후 마을 주민들을 불러놓고 인민재판을 열었다. 인민재판에서 좌익들이 “반동분자 가족들이니까 처단하는 것이 맞지 않소.”라고 하자 주민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는데, 제일 뒤에 있던 임 씨(이름 미상)라는 주민이 “조○구는 반동분자라 죽었지만 그 가족들은 아무 죄가 없다.”라고 해서 조○구의 처 이○○와 아들 조○○, 조○중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신청인의 진술을 확인하고자 사건 당시 영암군 학산면에 거주하였던 주민들을 탐문하였으나 가족 이외의 참고인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사건 당시 10세였던 조○구의 아들 조○○의 진술이 희생 경위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었기 때문에 조○구의 아들인 신청인과 참고인 진술을 통해 진실규명대상자가 좌익들에게 반론을 제기한 소위 ‘반동분자’라는 이유로 좌익에게 희생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다음에 계속
1) 참고인 김○○ 진술조서(2021.12.24.); 신청인 장○석 진술조서(2022.2.17.); 참고인 박○○ 진술조서(2022.2.16.) 진술에 따르면, “학산면 상월리에는 빨치산의 본부가 있었고, 집집마다 빨치산들이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참고인 김○진은 “집의 큰 방은 모조리 빨치산들이 차지하고 우리 가족은 작은 방 하나에 모여 지냈다.”고 하며, 신청인 장○석도 “우리 집을 빨치산들이 차지하였고, 아침마다 훈련도 하고, 노래를 불렀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박○○는 “당시 상월리 유천마을에는 해남에서 넘어온 유격대(빨치산)가 진을 치고 있었고 우리 집이 유격대 본부였다.”고 진술하였다.
2) 신청인 조○중 진술조서(2022.2.16.); 참고인 조○○ 진술조서(2022.4.5.). 신청인 조○중(당시 6세, 조○구의 아들)과 참고인 조○○(당시 10세, 조○구의 아들)은 정확한 사건 발생 시기를 기억하지 못했고, 양력 8월 초로 날씨가 아주 더웠고 보리 추수가 끝나 마당에 추수한 보리를 쌓아 놓았던 무렵 부친 조○구가 희생되었다고 진술하였다.
3) 신청인 조○중 진술조서(2022.2.16.); 참고인 조○○ 진술조서(2022.4.5.); 참고인 조○○은 “아버지 장례 치를 때 울면서 따라갔던 기억이 난다”라고 진술했다.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