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밝은 밤, 학산의 기억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4) #03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6년 03월 13일(금) 10:32

위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학산면 용산리 희생 사건 ‘이○구 희생 사건’

진실규명대상자 이○구는 사건 발생 당시 학산면 용산리에 거주하였고,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로 1950. 10. 2.(음력 8. 21.) 지방 좌익에 의해 군서면과 학산면 경계에 있는 메밀방죽으로 끌려가 죽창에 찔려 희생되었다. 이○구의 시아버지와 같은 마을에 거주하던 친척들이 함께 이○구의 시신을 수습하였고, 제삿날은 음력 8. 20.이다.

이○구의 제적등본상 사망일은 1950. 9. 20.(음력 8. 9.)이고, 제삿날은 음력 8. 20.(양력 1950. 10. 1)로 제적등본상 사망일과 제삿날이 일치하지 않으나 가족들이 제사를 모시는 제삿날을 기준으로 사건 발생 시기를 1950. 10. 2.로 판단하였다.

이○구는 사위가 경찰이고 같은 마을에 거주하던 당숙 김○○가 경찰이었기 때문에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로 희생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경찰 재직사실을 조회한 결과 이○구의 딸 ‘김○○(金○○)’의 남편 김○○(金○○, 장성군 북일면)가 경찰에 재직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사건 당시 같은 마을에 거주하던 참고인 김○○(당시 18세, 남)는 진실규명대상자 이○구가 “유격대에게 끌려가 공동터(메밀방죽, 공동지)에서 희생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 당시 피를 흘린 채 죽지 않은 상태였는데 뒤에 따라오던 좌익들이 다시 이○구를 찔러 죽이는 모습을 목격했다.”라고 진술하였다..

신청인과 참고인 진술, 제삿날, 제적등본상 사망일 등을 통해 진실규명대상자 이○구가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로 지방 좌익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학산면 은곡리 희생 사건 ‘김○용 희생 사건’

진실규명대상자 김○용은 사건 발생 당시 학산면 은곡리에 거주하였고, 우익인사라는 이유로 1950. 10. 15.(음력 9. 5.) 학산면 은곡리에서 독천리 가는 도중에 있는 신덕리 질팽이에서 지방 좌익에게 희생되었다. 김○용의 형수와 마을 주민들이 김○용의 시신을 수습하였고, 제삿날은 음력 9. 4.이다.

김○용은 「전국순국반공청년운동자명부(1964)」에 ‘전직 순경, 1950. 9. 25. 순국’, 「6·25사변 피살자명부」에 ‘24세, 경찰, 1950. 11. 10, 학산면 독천리’라고 기재되어 있다. 김○용의 제적등본상 사망일은 1950. 9. 25. 이고 제삿날이 음력 9. 4.(양력 10. 14)이므로 명부 및 제적등본상 사망일과 제삿날이 일치하지 않는다. 명부와 제적등본을 통해 김○용의 희생 사실을 확인하였고, 참고인 진술과 제삿날을 기준으로 사건 발생 시기를 1950. 10. 15.(음력 9. 5.)로 판단하였다.

김○용의 조카사위인 참고인 이○○(1952년생)은 결혼 후 장모(김○용의 형인 김○○의 처)로부터 ‘소방경찰’ 또는 ‘의용경찰’을 했던 처숙부 김○용이 1950. 음력 9. 5.에 사망했고, 마을 주민들과 장모가 함께 김○용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제사는 음력 9. 4.이라고 들었다.

사건 발생 전 김○용은 마을 일을 하던 형 김○○과 함께 피란 다니며 지내다가 학산분주소에 감금되었고, 누군가 문을 열어주어 두 사람은 함께 움직이면 모두 죽으니까 따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 뒤 김○○은 목포로 가고 김○용은 집 쪽으로 오다가 은곡리에서 신덕리가는 길에 있는 질팽이에서 좌익들에게 몽둥이에 맞아 희생되었고, 신덕리 주민들이 알려주어 김○용의 형수와 마을 주민들이 질팽이에 가서 김○용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의용경찰’로 활동했던 김○용이 인민군 점령기에 피란 다니다가 학산분주소에 감금된 뒤 풀려나 좌익들에게 희생되었고, 시신을 수습했다는 신청인과 참고인의 진술, 명부와 제삿날 등을 통해 진실규명대상자 김○용은 우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950. 10. 15. 희생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학산면 독천리 희생 사건

김○두 가족 희생 사건

진실규명대상자 김○두, 김○례(김○두의 처), 김○례(김○두의 딸), 양○남(김○두의 며느리), 김○식(김○두의 아들), 김○실(김○두의 손자), 최○애(김○두의 며느리), 김○순(김○두의 손자), 김○호(김○두의 손자) 등 가족 9명61)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이장 가족이라는 이유 등으로 1950. 10. 26.(음 9. 16.) 지방 좌익에 의해 학산면 독천리 앞산으로 끌려가 희생되었다. 김○두의 아들 김○○가 가족의 시신을 수습하였고, 제삿날은 음력 9. 15.이다.

김○두 일가의 제적등본상 사망일은 1950. 9. 16.로 사건 발생일인 1950. 10. 26.을 음력으로 환산하면 9. 16.이므로 음력 일자로 사망 신고된 것으로 판단된다.

사건 발생 당시 학산면 독천리에서 거주하던 김○두의 집안은 아들 김○○가 구장(이장)을 했고 일꾼이 두 명 있을 정도로 농사를 많이 지어 부유한 편이었다. 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찰을 따라 목포로 피신하여 부재중이었다. 사건 당시 신청인 김○단(당시 9세, 김○두의 손자)도 가족들과 함께 좌익에게 끌려갔으나 모친 양○남의 치마 속에 숨어있다가 혼자 살아남았다.

김○두는 한국전쟁 발발 후 사람들이 피신하라고 하자 “내가 농사만 짓고 살았는데 무슨 죄가 있다고 피난을 가냐”라고 하면서 피난을 가지 않았다. 사건 발생 전 ‘군복 차림에 총칼을 든 사람들’이 몇 차례 김○두 집으로 찾아와 집안을 수색하였다. 당시 김○두의 처 김○례는 “있는 것 다 가지고 가라. 우리는 농사만 짓는 사람들인데 무슨 죄가 있냐, 제발 살려달라”라고 빌었다고 한다. 사건 발생 당일 ‘달 밝은 밤에 골목을 가득 메울 정도로 좌익들이 몰려와서’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김○두 가족을 마을 앞산으로 끌고 갔다. 신청인 김○단은 모친 양○남이 총격당할 때 치마 속에 숨어있다가 살아남았고, 집에서 일하던 일꾼이 생존한 김○단을 김○두의 동생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참고인 문○○(당시 13세, 진실규명대상자 양○남의 조카)은 이모 양○남 가족이 희생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이모 집으로 갔으나 두려워서 근처까지만 갔다가 돌아왔으며, 이모 양○남의 딸 김○단만 혼자 살아남았다고 진술하였다.

진실규명대상자 김○두 가족의 희생 사실은 「6.25사변피살자명부」와 「영암 피해자현황조사(2007)」를 통해 확인된다. 「6.25사변피살자명부」에는 ‘김○두(金○斗), 남, 56, 농업, 9. 19. 선풍 뒷산’, ‘김○례(金○禮), 여, 22, 농업, 1950. 1. 17. 자택’, ‘김○식(金○植), 남, 26, 농업, 1950. 1. 17. 자택’, ‘김○순(金○順), 7세, 1950. 1. 17. 미암면 선황리 자택’에서 희생당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영암 피해자현황조사(2007)」에는 ‘영암군 미암면 선황리 마을 인근에서 김○두, 김복래, 양○○, 김단애, 김○수의 자 1, 2, 김○○의 딸 2명, 김○석, 최○○, 김○○석의 자, 김○○석의 딸’ 등 김○두 일가 12명이 희생당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김○래는 김○례의 오기로, 양○○는 양○남으로, 김○애는 김○례의 오기로, 신청인 김○단의 아버지인 ‘김○수의 자, 딸’은 신청인의 형제자매로, ‘김기석’은 ‘김○식’으로, ‘최○○’은 최○애를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영암 피해자현황조사(2007)」에는 희생 장소가 ‘미암면 선황리’로 기재되어 있지만, 김○두 가족의 본적이 ‘학산면 독천리 185번지’이고 “독천장 근처에 살았고, 가족들은 독천리 앞산에서 희생당했다.”라는 신청인의 진술에 따라 희생 장소를 ‘학산면 독천리 앞산’으로 판단하였다.

다음에 계속


1) ‘메밀방죽’ 소재지는 군서면 서구림리이다.
2) 신청인 이○자 진술조서(2022.2.17.), 신청인 이○자는 진실규명대상자 이○구의 며느리로, 결혼 후 시신을 수습한 시조부로부터 사건에 대해서 전해 들었다.
3) 진실화해위원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피해자 현황조사 용역사업 결과보고서–전남 영암군』, 2007, 18쪽. ‘김○○의 일가족 6명이 경찰(해남 산이면 지서장) 가족이라는 이유로 지방 좌익들에 의해 몰살’당했다고 기재되어 있으나 김○○의 경찰재직 기록은 찾지 못했다. 본 건 ‘상월리 신○운 희생 사건(2마-8312)’의 신청인 신○오는 형 신○운은 고종사촌인 김○○ 때문에 희생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이○구와 김○○ 일가는 경찰가족이라는 이유로 지방 좌익들의 표적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4) 「전남지역 경찰 재직사실 확인 요청 및 전남 의용소방대 관련 자료 요청」, 진실화해위원회 조사2과-564, 2022. 4 .21; 「전남 경찰 재직사실 확인 관련 회신」, 경무기획정보화장비과-9182, 2022. 4. 25.
5) 전라남도 경찰청에 의뢰한 결과 김○용의 경찰 재직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전남 경찰 재직사실 확인 협조 요청」, 진실화해위원회 조사2과-564, 2022. 4. 21; 「전남 경찰 재직사실 확인 협조 요청 관련 회신」, 경무기획정보화장비과-9182, 2022. 4. 25.
6) 참고인 양○○ 진술조서(2022.4.6.); 신청인 김○화 전화 녹취(2022.4.18.); 신청인 김○화는 현재 투병 중이라 면담조사가 불가능해서 전화 통화로 대신했다. 신청인은 1955년생으로 숙부 김○용의 희생 경위를 어머니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고, 사건 발생 시기에 대해서는 ‘추석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을’이라고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이 기사는 영암열린신문 홈페이지(www.openmedia.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www.openmedia.co.kr/article.php?aid=3441621618
프린트 시간 : 2026년 09월 29일 00:1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