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탄 집과 남겨진 기일 (2)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4) #07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6년 04월 17일(금) 10:54

위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현○길 가족 희생 사건

사건 당시 현○길 가족은 학산면 학계리 광암마을에 거주하였고, 현○길의 아들 현○○이 광암지서 경찰과 연루된 일을 하여 우익인사 가족이라는 이유로 희생된 것으로 판단된다.1) 현○○의 경찰재직 경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한국전쟁 발발 후 좌익들에게 주목을 받게 되자 현○○은 피신하였다고 한다. 목격자 고○○ 진술에 따르면 사건 발생 당시 좌익들이 “아들 어디에 있냐.”라고 하며 현○길 가족을 집 앞 논에서 구타하다가 가족들이 대답하지 않으니까 그 옆 하천으로 끌고 가 죽였다.2)

17세 때 결혼하여 학계리 광암마을에서 묵동리로 이주한 현○길의 딸 현○○는 사건 발생 당시 20세였고, 친정 식구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암마을로 와서 동생 현○○과 함께 집 근처 산에 파놓은 구덩이에서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광암마을 중뫼산에 매장하였다. 그 뒤 죽창을 든 사람들이 묵동리에 사는 현○○ 집까지 찾아온 적이 있고, 그들 중 한 명이 “이 사람은 출가외인인데 뭐하러 죽이냐.”라고 해서 현○○는 살아남았다.3)

현○길 가족의 희생 사실은 『6.25사변피살자명부』를 통해 확인된다. 『6.25사변피살자명부』에는 ‘현○길(玄○吉), 현○자(玄○子), 현○선(玄○善)이 1951. 1. 7. 학산면 묵동리’에서 희생되었다고 등재되어 있다. 희생된 가족 4명 중 3명만 등재되어 있고, 제삿날과 희생 시기가 다르나 현○길 가족이 희생되었다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데 참고하였다.

『영암 피해자 현황조사(2007)』 결과에 따르면, 학산면에서는 일제하 광주지역의 대지주이자 자본가(호남은행 설립자)였던 현○○ 일가가 상당수 좌익들에게 희생되었는데, 현씨 일가의 경제적 부가 이들의 희생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학산면 학계리 광암마을이 현씨 집성촌이었던 점으로 볼 때 현○길 가족도 그러한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희생된 것으로 판단된다.4)


현○호 가족 희생 사건

진실규명대상자 현○호, 김○소(현○호의 처), 현○태(이명 현영두玄○斗, 현○호의 아들), 박○례(현○호의 며느리), 현○식(현○호의 손자) 등 가족 5명은 1950. 11. 27.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 등으로 학계리 광암마을 제정골에서 지방좌익에 의해 죽창에 찔려 희생되었다. 현○호의 아들들이 시신을 수습하였다.

좌익들은 현○호 가족을 살해한 뒤 현○호의 집을 불태우고 빠져나갔다. 당시 같은 마을에서 거주하던 박○○(당시 5세)은 “현○순(신청인) 씨 집뿐 아니라 여러 집이 다 타버렸다. 그때 밤에 추울 때였는데 불을 쬐러 갔다가 아버지에게 ‘여기 있다가 죽으려고 그러냐’라고 야단맞은 기억이 난다.”라고 진술하였다.

현○호의 아들 현○○(玄○○)가 경찰이었고,5) 현씨 일가가 광암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부유하게 살았던 점이 희생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호의 손자 현○식은 당시 2세였기 때문에 어머니 박○례와 함께 있다가 희생되었고, 손녀 현○순(신청인, 당시 4세)은 학산면 갈마마을의 고모 집에 가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진실규명대상자 박○례는 사건 발생 당시 즉사하지 않았다. 당시 제정골 근처에 살고 있던 마을 주민이 피투성이가 된 박○례를 제정골에서 본인 집으로 데려갔고, 박○례는 며칠 뒤 그 집에서 사망하였다.6) 현○순은 성장하면서 집안 어른들로부터 제정골 근처에 살고 있던 마을 주민이 피투성이가 된 어머니(박○례)를 부축해서 마을로 데리고 왔고, 어머니가 “물만 그렇게 많이 안 마셨어도 살았을 수도 있었는데.”라는 말을 들었다.

현○호 가족의 희생 사실은 『6.25사변피살자명부』를 통해 확인된다. 『6.25사변피살자명부』에는 ‘현○호(玄○鎬), 현○두(玄○斗), 1951. 1. 7. 학산면 학계리’에서 희생되었다고 등재되어 있다. 현영두(玄○斗)는 현○호의 아들 현○태(玄○泰)의 이명이다. 제적등본상 사망일과 장소는 현○호, 박○례, 현○식은 미등재, 김○소는 ‘1955. 10. 27. 학산면 학계리 143’, 현○태는 ‘1950. 8. 30. 학산면 학계리 143’이다.

학계리 광암마을에서 좌익에 의해 경찰 가족이 다수 희생당했고, 사건 발생 후 현○호의 집이 불탈 때 여러 집이 불탔으며, 광암마을 경찰 가족을 모두 제정골로 끌고 가서 죽였다는 참고인 진술을 통해 광암마을 ‘김○태 가족’, ‘현○길 가족’, ‘현○호 가족’ 희생 사건이 같은 시기에 발생했다고 판단하였다.7)

다음에 계속


1) 참고인 현○○ 진술조서(2022.2.18.); 참고인 고○○ 진술조서(2022.3.4.); 「전남 경찰 재직사실 확인 협조요청」, 진실화해위원회 조사2과-479, 2022. 4. 11.; 「전남 경찰 재직사실 확인 협조요청 관련 회신」, 경무기획정보화장비과-8100, 2022. 4. 12. 전남경찰청에 현○○의 경찰 경력을 조회하였으나 현○○의 ‘경찰재직’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다. 참고인 고○○은 현○○이 정식 경찰이 아니라 지서에서 근무하던 ‘급사(給使)’였을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2) 참고인 고○○ 진술조서(2022.3.4.); 참고인 현○○ 진술조서(2022.6. 29.); 사건 발생 당시 13세였던 참고인 고○○은 1950. 음력 9. 29. 빨치산을 소탕하러 들어온 경찰에 의해 묵동리 집이 불타는 바람에 학계리 광암마을에 가서 지냈다고 한다. 고○○은 광암마을에서 지내던 중 현○길 가족이 구타당한 뒤 끌려가 희생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참고인 현○○은 “묵동리 마을이 불타는 바람에 (학계리 광암마을) 우리 집 방이 5개 있었는데 묵동리 사람들이 우리 집에 피난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고○○도 우리 마을에 피난 와 있었다.”라고 진술하였다.
3) 참고인 현○○ 진술조서(2022.2.18.); 참고인 박○○ 진술조서(2022.4.7.); 참고인 박○○은 사건 당시 5세였고, 학계리 현○○의 아버지와 어머니 등 가족들이 좌익에 의해 광암마을에서 희생당해 서당골에 매장하였고, 본인이 10년 가량 벌초를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박○○은 가족들이 희생당한 뒤 현○○이 자주 본인의 집에 놀러왔는데, 그때마다 군대 이야기만 했던 기억이 난다고 진술하였다.
4) 진실화해위원회, 앞의 책, 2007, 9쪽.
5) 전남 경찰청에 조회한 결과 현○○가 1949.10.27.~1954.1.24. 영암에서 경찰로 재직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경찰 경력사항 확인 협조요청」, 진실화해위원회 조사2과-500, 2022. 4. 13.; 「경찰 경력사항 확인 협조요청 관련 회신」, 경무기획정보화장비과-8516, 2022. 4. 18.
6) 참고인 현○○ 진술조서(2022.6.29.) 참고인 현○○은 “현○순의 어머니가 (사건) 현장에서는 안 죽었는데 우리 아버지(현○○)가 그곳에서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온 뒤 며칠 있다가 사망했다”라고 진술하였다.
7) 참고인 박○○ 진술조서(2022.4.7.); 참고인 현○○ 진술조서, 2022.6.29.) 참고인 현○○은 ‘’우리 마을(학계리 광암마을) 사람들은 현씨 일가라고 해서 웬만하면 반동분자 취급을 받았다. 아버지(현○○)도 내무서에 잡혀 있다가 죽을 뻔했는데 아버지가 인심을 얻었는지 좌익 중에 누가 살짝 내보내 주었다.“라고 진술하였다.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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