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아픔을 관객의 자리에서 바라본다면 영암열린신문 opennews@openmedia.co.kr |
| 2026년 06월 19일(금) 1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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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무겁게 느껴질 때, 우리는 종종 그 고통에 완전히 잠식된다. 그러나 한 발짝 떨어져 ‘관객’의 시선으로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는 순간, 감정의 결은 달라진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를 통해, 고독과 상처를 해석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안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쓴 《좀머 씨 이야기》는 평생을 허름한 옷차림에 배낭 하나 메고는 목적 없이 종일 걸어 다니기만 하다 호수에서 쓸쓸히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화자인 소년은 좀머 씨와 극적인 몇몇 순간에 우연히 만난 기억들이 있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소년은 아버지와 차를 타고 경마장에서 돌아오다 여느 때처럼 묵묵히 걷고 있는 좀머 씨를 만난다. 소년은 음악 선생에게 인격모독에 가까운 심한 꾸중을 들은 날 죽어버리고 싶다는 마음에 나무에 올라갔다가 좀머 씨를 보기도 한다. 그때 좀머 씨는 배낭 속에서 빵과 물을 꺼내서는 허겁지겁 먹어 치우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늘 죽음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만 같던 좀머 씨가 꾸역꾸역 빵을 먹으며 살아보려 하는 모습을 보고 나자 소년의 자살 결심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호수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좀머 씨를 보게 된다. 좀머 씨가 고독했던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순간이다. 소년은 많이 갈등하기는 하나 그의 마지막 순간을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 이후 누구에게도 그날 자기가 본 장면을 말하지 않는다. 소년이 자살하려는 좀머 씨를 그냥 바라보기만 한 것은 언젠가 들었던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말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소년은 좀머 씨의 그 말 한마디에서 마음의 깊은 상처와 허무를 보았다. 세상 아무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이대로 살다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도 또 느꼈으리라.
수십 년을 이렇게 살다 마치 탈출이라도 하듯 호숫가로 걸어들어가 생을 마감한 좀머 씨. 그가 왜 그렇게 살다 갔는지 책에는 이유가 나와 있지 않다. 이유가 있었다면 오히려 소설적 감동은 덜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독자들은 설명하기 힘든 안타까움과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고독’이라는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설명되지 않는 고독, 좀머 씨의 삶
과연 무엇이 좀머 씨를 그토록 쓸쓸한 고독으로 밀어 넣었을까? 소년이나 마을 사람처럼 나 역시 무언가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다고 짐작할 뿐이다. 다만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좀머 씨의 그런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쾌함만 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년은 살아보려 애쓰는 그를 보고 자살 결심을 바꿀 수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를 측은해하며 상대적으로 안락한 자기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누군가는 좀머 씨와 같이 걸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을 수도 있다. 혹은 좀머 씨의 걷기를 일종의 고행 수련으로 보면서 안일한 일상에 젖어 있는 자신을 반성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좀머 씨는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 치열했다. 그가 무엇을 찾아다녔든, 피해 다녔든, 그는 걷기를 통해 자기 삶의 무엇인가를 채웠고 삶을 연장했다. 그가 호수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말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으로 충분하다’가 아니었을까.
너무 아프고 힘들어 세상이 다 적군처럼 보인다면 오늘 밤 일기에는 이렇게 한 줄 적어보면 어떨까. 이건 좀머 씨에게서 빌려온 방법이다. “오늘부터 나는 관객이다”라고….
관객의 자리에서 다시 보는 나
이제 더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에 기대어 생각하기도 그만두자. 나는 관객이다. 객석에 편안히 앉아 지금부터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따지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필요한 대사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역할은 그들 자신의 욕망과 상처에서 나온다. 아버지라서 아버지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이고자 할 때 아버지 역할을 한다. 욕망을 이기지 못해, 상처를 이기지 못해, 나름대로 열심히 자기가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한다. 남을 억압하는 일, 이간질하는 일, 독설을 퍼붓는 일, 예쁜 선물을 준비하는 일들도 다 그런 일이다.
작정하고 일주일만 그렇게 해보자. 정말 힘들어서 하루하루 눈뜰 때마다 다시 눈을 감고 싶다면 밑지는 셈치고 해보는 거다. 무기력이든 무엇이든 현재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길은, 잠시만이라도 그것을 생판 남의 일처럼 바라보는 그때 찾아진다. 그러면 사람들이 달리 보인다. 무섭던 사람이 안 무서워지고, 밉기만 하던 사람이 가련해 보일 수도 있다. 이해해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가끔 하는 말이 있다. 상담자로 살다 보면 나는 법적으로, 윤리적으로 공정성을 잃을 때가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느 것이 맞고 틀리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듣다 보면 때론 옳은 것이 그른 것이 되기도 하고 틀린 것이 맞는 것이 되기도 함을 수없이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객관적으로 보는 법, 관객으로 보는 법을 훈련한 결과임을 아는지….
아픔이란 결국 내 아픔이기 때문에 아프다. 그렇다면 한번 관객이 돼 내 아픔을 보자. 남의 아픔처럼 바라보자. 그러면서 주변 사람의 일상을 무대에 선 배우들의 충실한 역할처럼 바라보자.
그렇게 관객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다가 누구나 다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될 때쯤, 문득 자신을 돌아보는 거다.
김영아 그림책심리성장연구소 소장
건강소식 2026년 06월호 中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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