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필을 놓은 자리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5) #06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6년 07월 31일(금) 10:49

위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진실규명대상자 김○천(2다-1995, 신청인 김○호)

진실규명대상자 김○천(金○天, 남, 1929년생, 교사)은 1950. 10. 17.(음력 9. 7.) 군서면 마산리 낙안촌마을 뒷산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신청인 김○호(1954년생, 조카)의 진술에 따르면, 김○천은 목포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본적지인 군서면 마산리 낙안촌마을로 와서 거주하고 있었다. 1950. 10. 17.(음력 9. 7.) 낮, 김○천은 마을주민들과 마산리 낙안촌마을 뒷산에 있다가 마을에 들어온 경찰에 의해 총살되었다. 김○천의 형들이 시신을 수습하였고, 군서면 해창리에 있는 선산 옆에 매장하였다. 김○천의 제삿날은 음력 9. 6.이다.

제적등본에는 김○천의 사망신고가 되어 있지 않고, 족보에는 ‘신묘(辛卯) 1951. 9. 6. 졸(卒)’로 기재되어 있다.1) 신묘(辛卯)는 1951년을 뜻한다.

목포서부초등학교 소장 자료(학교 연혁지)에 ‘준교사(準敎師), 김○천(金○天), 본교 전입년월일 1949. 11. 30., 본교 전출년월일 1950. 6. 25., 사망’으로 기재되어 있다.2)

2007년 피해자현황조사에 ‘김○천, 남, 22, 군서면 마산리, 1950. 10. 16., 낙안촌 마봉, 총살, 경찰’로 기재되어 있다.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 진실규명대상자 김○천의 시신이 군서면 마산리 낙안촌마을 뒷산에서 가족들에 의해 수습된 점, (2) 김○천의 제삿날이 희생 전날인 음력 9. 6.인 점, (3) 족보상 사망연도가 1951년으로 실제 사망연도와 1년 차이가 나나 사망일자가 9. 6.로 제삿날과 동일한 점, (4) 경찰의 지시에 따라 경찰과 함께 낙안촌마을에 갔다가 마을주민들이 희생되는 모습을 목격한 참고인 최○상의 진술이 구체적인 점, (5)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1950. 10. 17. 군서면 구림리에서 경찰에 의한 포위작전이 발생한 사실이 확인된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김○천은 군서면 동구림리 등에서 작전을 마치고 마산리에 들어온 경찰에 의해 1950. 10. 17.(음력 9. 7.) 군서면 마산리 낙안촌마을 뒷산에서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진실규명대상자 전○백(2다-14049, 신청인 전○수)

진실규명대상자 전○백(全○百, 남, 1925년생, 구림초등학교 교사3))은 1950. 11. 11.(음력 10. 2.)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 뒷산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신청인 전○수(1950년생, 아들)의 진술에 따르면, 전○백은 구림초등학교 교사였고, 군서면 동구림리 65번지 학암마을에서 아버지, 어머니, 부인, 아들과 거주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 서구림리 남송정마을에 살던 지인 최씨가 경찰에 의해 사망하여 전○백이 그 집에 부조금을 준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을 알게 된 경찰이 좌익 집안에 부조금을 줬다면서 전○백을 잡으려고 하였다. 이에 전○백이 경찰을 피해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 뒷산으로 피신하였으나 경찰에게 붙잡혀 총살되었다.

전○백이 집에 돌아오지 않자, 전○백의 아버지가 전○백을 찾으러 다니다가 도갑사 뒷산에서 전○백의 시신을 찾았다. 전○백의 아버지가 시신을 수습하여 군서면 월곡리 호동마을에 있는 전씨 선산에 매장하였고, 현재도 그곳에 묘가 있다. 전○백의 시신을 찾은 날이 1950. 11. 13.(음력 10. 3.)이고, 제삿날은 희생 전날인 음력 10. 1.이다. 전○백의 아들 전○수(신청인)가 음력 1950. 9. 9.에 태어난 지 1달도 되지 않아 전○백이 희생되었다.

참고인 최○○(1934년생, 이웃)의 진술에 따르면, 구림초등학교 교사4)로 근무하였던 전○백이 1950년 가을에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참고인은 전○백의 부인으로부터 자신이 아들 전○수를 낳은 지 1달도 안 되어서 남편 전○백이 사망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5)

전○백의 사망일이 제적등본에는 ‘1955. 10. 2. 본적지에서 사망(1956. 4. 9. 신고)’으로, 족보에는 ‘기(忌) 10월 2일’로 기재되어 있다.6)

2007년 피해자현황조사에 ‘전○백, 남, 26, 군서면 동구림리, 1950. 10. 2., 구림, 총살, 군경’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 진실규명대상자 전○백의 시신이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 뒷산에서 전○백의 아버지에 의해 수습된 점, (2) 전○백의 제삿날이 희생 전날인 음력 10. 1.이고, 족보에 기재된 기일이 10. 2.인 점, (3) 전○백의 시신을 수습한 할아버지로부터 관련 내용을 전해 들은 신청인 전○수의 진술이 구체적인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전○백은 1950. 11. 11.(음력 10. 2.)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 뒷산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진실규명대상자 전○순(2다-1115, 신청인 최○배)

진실규명대상자 전○순(全○順, 여, 1916년생, 가사)은 1951. 1. 19.(음력 12. 12.) 영암면 대신리 야산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신청인 최○배(1937년생, 아들)의 진술에 따르면, 전○순은 군서면 동구림리 56번지에서 시아버지, 남편, 자녀들과 함께 거주하였다. 전○순은 집에 있는 재봉틀로 옷을 만들어 팔았는데, 인민군 점령기 때 인민군이 전○순의 집에 와서 강제로 재봉틀을 가져갔다. 1951. 1. 어느 날, 경찰은 인민군에게 재봉틀을 주었다는 이유로 전○순과 전○순의 남편 최○○를 영암경찰서로 끌고 갔다. 최○○의 아버지 최○○이 손자 최○배(신청인)와 최○○(1949년생, 당시 18개월)을 데리고 영암경찰서로 전○순을 만나러 갔고, 전○순이 막내아들 최○○에게 젖을 주고 나면 가족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2~3일에 한 번씩 7~8번 정도 영암경찰서에 다녀왔다.

1951. 1. 19.(음력 1950. 12. 12.), 최○○은 손자 최○○을 데리고 영암경찰서에 갔다가 전○순이 보이지 않아 경찰에게 물어보니, 경찰이 영암면 대신리에 있는 야산으로 가보라고 하였다. 최○○은 최○○을 집에 데려다 놓고, 조카와 함께 대신리 야산에 갔더니 구덩이에 있는 수많은 시신 속에 전○순의 시신이 있었다. 머리에 총을 맞아 전○순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전○순이 키가 크고 발도 커서 전○순이 신었던 고무신을 보고 시신을 확인하였다. 전○순의 시신을 수습하여 근처 야산에 매장하였다가 1960. 5.경 군서면 동구림리에 있는 선산으로 이장하였다. 신청인은 이장할 때 전○순의 두개골이 깨져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제삿날은 희생 전날인 음력 12. 11.이다.

다음에 계속


1) 『김해김씨사군파대동보(金海金氏四君派大同譜)』, 병권7·정권7
2) 「목포서부초등학교 재직사실 확인 자료」(목포서부초등학교-11927, 2022. 11. 21.); 「조사 협조 요청(교사 재직사실 확인)」(조사2과-1905, 2022. 11. 8.)
3) 진실규명대상자 전○백이 구림초등학교 교사였다는 신청인의 진술을 확인하고자 구림초등학교에 관련 자료를 요청하였으나, 현재 구림초등학교에는 1951년 이후 생산된 기록만 있어 전○백의 교사 재직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 「교사 재직사실 확인 결과 회보」(구림초등학교-7754, 2023. 8. 30.); 「조사 협조 요청(교사 재직사실 확인 요청)」(조사2과-1851, 2023. 8. 29.)
4) 참고인은 자신이 구림초등학교 5학년을 다니던 해에 해방이 됐고, 다음 해인 1946년에 졸업하였는데, 자신이 재학 중일 때는 선생님 중에 전○백이 없었다고 한다.
5) 참고인 최○○ 진술조서(2023. 8. 7.) 참고인과 전○백의 부인은 서울에서 살면서 재봉 일을 하였는데, 그때 참고인이 전○백의 부인으로부터 전○백이 희생된 경위에 대해 들었다고 한다.
6) 『천안전씨두평군파보(天安全氏兜平君派譜)』권1, 1987, 690쪽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이 기사는 영암열린신문 홈페이지(www.openmedia.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www.openmedia.co.kr/article.php?aid=3555641240
프린트 시간 : 2026년 09월 28일 16:3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