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과 다보의 겨울: 잊혀진 목소리들의 메아리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연산·다보마을 사건

1950년 12월 18일 연산마을에서도 군경에 의해 주민 10여 명 이상이 사살되었다. 냉천마을 수색을 마친 군경은 그날 오후 연산마을 뒷산인 영보재에서 마을로 내려왔다.

병 중이었던 김남현(당시 60대)은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집에 있다가 희생되었다. 김남현의 딸인 김하순(당시 19세)은 “아버지는 병 중이라 피난을 못 나갔다. 돌아와서 보니 경찰이 집에 불을 질러 아버지는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옆 마을인 다보마을로 피난 갔다가 그곳에서 군경에게 붙잡혀 희생된 경우도 있었다. 가족과 함께 다보마을로 피난을 갔던 나종남(여·당시 15세)의 진술이다.

“언니(나만임·당시 19세)는 막내동생(남·당시 3세)을 안은 채 다보마을 입구 ‘도리봉산’ 앞에서 사살되었다. 언니가 동생을 살리려고 품에 안고 엎드려서 동생은 총에 맞지 않았지만 놀라서인지 같이 죽어 있었다. 언니가 동생을 안은 채 굳어버려서 뗄 수가 없어 같이 묻었다. 그게 맘에 걸렸는데 그 뒤로 ‘놀러 가는데 애기가 따라와서 시끄럽다. 애기 좀 떼어줘’ 하는 언니의 환청에 시달렸다.”

박민서의 가족도 이날 희생되었다. 박민서¹⁾의 아들 박찬일(당시 14세)은 “아버지·형수(민현순·여)·조카(민현순의 아들·당시 3세)·누나(박찬남·여)가 피난을 나갔다가 독가재에서 사살되었는데 아버지는 옆구리와 허벅지에 총을 맞고도 살아 있어 집에 모셨는데 결국 다음날 돌아가셨다”고 진술하였다.

이날 연산마을 희생자 중 신원이 밝혀진 사람은 김남현(당시 60대), 박민서 가족 4명, 박승봉 내외(당시 60대), 나만임 가족 2명 등 9명이었다. 이들은 50대 이상의 노인 4명, 3세 어린이 2명, 여성 3명으로 희생자 모두 전투능력이 없는 노약자였다. 이들의 시신은 모두 수습되었다.

한편 이날 다보마을에서도 주민 40여 명이 군경에 의해 사살되었다. 다보마을 주민들도 3일간 총성으로 이미 젊은 사람들은 피난을 나갔고 마을에는 노인·여자·어린이들이 주로 남아 있었다.
군경은 다보마을에 들어와 집집마다 수색을 하여 끌어낸 주민들을 마을 입구 ‘도리봉산’ 앞에서 사살하였다.

이날 시부모(강달선·박이곡)와 동서(강달선의 큰며느리)·조카(강달선의 손자·당시 3세)의 시신을 목격한 나애순(당시 18세)은 “사람들을 줄줄이 앉혀놓고 한꺼번에 총을 쏘아댄 듯 시신이 나란히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이날 할머니(김학례)와 두 어머니(김여문과 서모), 동생 2명을 잃은 이득우(당시 15세)는 “나는 아침에 마을사람들이랑 휩쓸려 금정 내산으로 피난을 나갔다가 5일 뒤 돌아와 보니 가족이 모두 죽고 여동생 경애는 총상을 입고 내산으로 도망쳐 살았다”고 진술하였다. 육촌인 정찬화(당시 40세)와 정윤식 가족 14명도 이날 몰살하였다.²⁾

정사동(여·당시 70대)과 김학례(여·당시 80)는 노인이라 밖에 나올 수 없는 상태에서 집안에서 총을 맞고 집과 함께 불에 타 죽었다.

조사결과 신원이 확인된 다보마을 희생자는 정사동, 문봉현(여·당시 52세)³⁾, 강달선 가족 4명, 정찬화 가족 8명, 정윤식 가족 6명, 김학례 가족 5명, 박미남 가족 6명⁴⁾, 박현재의 처, 김봉진 형제 2명, 김영만 가족 2명등 36명으로 대부분 가족 단위 희생자였다.

이 중 50대 이상의 노인은 9명, 10세 이하 어린이는 11명, 여성이 23명이었다. 20∼40대의 남성은 정찬화(당시 40세·한약업)와 정옥기(당시 20세·정찬화의 아들) 2명뿐이었다. 이들의 시신은 모두 수습되었다.

다음에 계속

1) 연산마을 참고인들에 의하면 박민서는 일제강점기에 금정면장을 하였다.
2) 참고인 이갑순 진술조서(2008.11.5.). “정찬화와 정윤식은 육촌형제이다. 두 집 식구가 다 죽어버려서 내 아들 정문기가 정찬화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정윤식만 살았고 이날 정윤식의 부모, 처, 첩, 딸 2명 등 가족이 모두 사망하였다.”; 참고인 박경서 통화보고서(2008.10.29.); 참고인 이득우 진술조서(2008.11.5.). “정찬화 씨 집안에 경찰이 있었는데 미리 연락을 주어 피난 나가지 말라고 해서 집에 남아 있다가 해병대가 싹 끌어내 죽이는 바람에 몰살을 했다.”
3) 참고인 박경서 통화보고서(2008.10.29.). “이틀 뒤 돌아와 보니 ‘도리봉산’ 앞(마을 입구)에 어머니와 다른사람들 시신이 있었다.”; 참고인 박찬일 통화보고서(2008.10.28.). 문봉현의 제적부에는 “1961년 11월 10일 사망”으로 기록되어 연도는 다르나 실제사망일 음력날짜와 일치하였다. 문봉현의 족보에는 “1950년 11월 10일 사망”으로 실제사망일로 기록되어 있다.
4) 참고인 이갑순 진술조서(2008.11.5.). “정지찬 큰부인, 작은부인, 작은부인의 아들(7살), 딸(5살), 큰부인의 딸 2명(19살, 6살) 해서 가족 6명이 죽었다.”; 참고인 채삼순 진술조서(2008.11.5.).

선호성 기자 opennews@open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