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성, 숨겨진 역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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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성, 숨겨진 역사를 만나다
영암 지역사 대기획 - 우리 곁의 보물 영암성 이야기 ①
  • 입력 : 2025. 03.21(금) 11:39
  • 선호성 기자
▲ 수성사 뒷골목


2024년 영암학회가 3년간의 연구 끝에 발간한 “영암성 영암사람들”은 지역 핵심 문화유산인 영암성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한 의미 있는 성과물이다. 하지만 학술서의 특성상 일반 군민들이 접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여, 본지에서는 그 핵심 내용을 조금 더 쉽고 흥미롭게 재구성하여 4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현대 영암읍 중심가 곳곳에 흔적만 남아있는 영암성은 500여 년간 영암의 역사와 문화의 중심이었다. 최근 영암군의 문화재 보존 및 관광 자원화 노력이 진행되는 가운데, 본 기획은 군민들에게 생활 속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리고 보존과 활용에 관한 관심을 높이고자 하는 바이다.<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영암성, 숨겨진 역사를 만나다
② 영암성 안에서의 하루
③ 불꽃처럼 빛난 영암성의 순간들
④ 기억 속으로 사라진 영암성, 그리고 부활


오늘날 영암읍 중심가를 걷다 보면 수백 년 동안 이곳을 지켜온 거대한 성곽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경찰서 뒤편 성벽의 흔적, 성당 계단에 재활용된 성돌, 무등아파트 뒤편의 각자성석(刻字城石)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100여 년 전까지 영암 사람들의 삶을 품었던 영암성의 역사를 찾아 나섰다.


왜구의 침입과 축성 배경

영암성을 쌓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왜구의 침입이었다. 고려 충정왕 2년(1350) 이후 잦아진 왜구의 침입은 우왕 때인 1378년에 무려 50여 차례나 국토를 유린했고, 영암도 그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당시 왜구의 침략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는 「고려사」에 기록된 영암 출신 최씨 부인의 비극적 사연에서 엿볼 수 있다. 1379년 왜구가 진주를 침략했을 때 정만의 아내 최씨는 자식들을 데리고 산으로 피신했으나 왜구에게 발견되었고,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후 조정에서는 그녀의 충절을 기려 정려문을 세우고 그녀의 아들 정습에게 특혜를 내렸다. 이러한 비극적 사건들은 당시 영암 사람들이 왜구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방어 시설을 절실히 필요로 했음을 보여준다.

처음 영암 사람들은 월출산에 있는 영암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산성은 바위산이라 물이 부족했고, 가파른 산길은 노인과 아이들이 오르기 힘들었다. 또한 산성에 피신해도 전염병에 시달리거나 굶주림을 겪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평지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 영암산성, 산성대 위치


영암성의 축성 시기

영암성의 축성 시기는 여러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451년 도체찰사 정분(鄭苯)의 보고에 의하면, 영암성은 ‘잉구읍성(仍舊邑城)’, 즉 옛날 읍성을 그대로 활용한 성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는 세종의 명으로 성을 쌓기 시작한 1429년 이전에 이미 영암에 성곽이 상당 부분 만들어져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금성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1435년 2월 12일 의금부도사 민건(閔騫)이 영암성의 퇴축(退築, 넓혀 쌓음) 관련 사항을 조사하러 나주에 왔다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은 그 이전에 이미 영암에 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목포대학교 고용규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시굴 조사에서 출토된 청자와 기와 조각 등을 근거로 영암성이 14세기 고려 말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고려 말에 시작된 영암성은 세종 11년(1429) 병조판서 최윤덕의 제안으로 더욱 견고하게 보완되었고, 문종 원년(1451)에 1차로 완공되었다. 1476년에는 이성(李城) 군수가 동헌을 정비하면서 영암성의 면모가 더욱 갖추어졌다.

▲ 무너진 성곽과 기와 파편들


축성 방식과 구조적 특징

영암성은 『맹자』의 “성을 쌓을 때는 구릉을 최대한 이용하고, 해자를 만들 때는 천택(川澤)을 이용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한 사례다. 역사 자료를 보면, 영암성은 범바위산(영암성당 뒷산)을 중심으로 현 경찰서 뒤편, 영암군청 뒤편 등 야트막한 능선들을 연결하여 축조했다.

성을 쌓을 때는 능선 바깥의 산자락을 깎아내고, 성곽의 바닥을 일정한 깊이까지 파낸 후 자잘하게 깬 할석(割石)들을 깔고 다져서 그 위에 기단석을 놓았다. 그 위로 반듯하게 다듬은 일정한 크기의 돌들을 잔돌 끼워 쌓기로 쌓아 올렸다. 수직으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뒤로 조금씩 물러나는 퇴축 방식으로 돌들을 튼튼하게 쌓아 올렸다.

성의 안쪽은 기단 부분에 자잘하게 깬 돌들을 깐 후에, 능선 바깥쪽에서 파낸 흙을 가져다가 비스듬히 다져 올리는 내탁(內托) 방식을 사용했다. 성안에서 성벽 위로 오를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돌계단도 만들었다. 또 경찰서 뒤편과 영암성당 뒤편의 고지대는 능선을 평탄하게 고른 후, 그 위에 기단석을 놓고 안팎을 석재로 쌓아 올리는 협축(挾築) 방식도 일부 활용했다.

돌은 옮기기가 수월하도록 가급적 근처에서 구했다. 영암군청 뒤 객사등에서도 많은 돌을 캐냈고, 범바위산 백년동 고개 부근에도 돌을 캐낸 자국의 절벽들이 있다. 산성대를 오르다 보면 어귀에서부터 위쪽까지 채석을 한 흔적들이 도처에 남아 있다.

무등아파트 뒤편에서 발견된 각자성석(刻字城石)에는 ‘□□始面’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당시 면별로 구간을 나누어 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성을 쌓은 책임자를 표시하기 위한 일종의 공사 실명제를 시행했음을 보여준다.

▲ 영암파크 뒤편과 영암군청 뒤편 암벽의 성돌을 캐낸 흔적


규모와 형태: 전라도에서 손꼽히는 대형 성곽

완성된 영암성의 둘레는 4,369척(약 2.01km)에 달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도 상당히 큰 규모였다. 소설가 벽초 홍명희가 1929년 소설 『임꺽정』에서 묘사한 내용을 인용하면:

“영암군은 소읍이 아니요 또 요해처(要害處)이므로 성(城)이 토성(土城)이 아니고, 당당한 석축(石築)이다. 장흥부의 장녕성(長寧城, 현 장흥성)은 둘레가 천척(尺) 안에 드는 작은 성이니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좌정(坐定)하고 있는 곳인 병영성이 3천척이 못 된다. 광·나주(光羅州) 목사라고, 광주와 아울러 치는 목사치하(治下) 나주성이 3천척이 얼마 넘지 못하는데, 영암성은 둘레가 4,369척인 전라도 내에서 큰 성”이라고 기록했다.

문종 원년(1451) 도체찰사 정분의 보고에 따르면, 영암성은 높이 9~12척, 여장고(女墻高) 3척, 적대(敵臺) 6개소, 문이 3개소, 우물 2개소, 여장은 639개소였다. 그러나 1897년 영암읍지에는 무려 1,025개의 성가퀴가 기록되어 있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방어 시설이 더욱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 위에는 1,025개의 성가퀴(여장)가 있었고, 동문과 남문, 서문 등 세 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해자(垓子) 역할을 하는 자연 하천이 성 밖으로 흘러 방어력을 더했다.


영암성 안의 주요 시설들

영암성이 축조된 후, 성 안에는 다양한 시설들이 들어섰다. 동헌(東軒), 객사(客舍), 향교(鄕校), 작청(作廳) 등 행정 시설과 함께 사직단(社稷壇), 성황사(城隍祠) 등 제사 시설, 양휘루(楊輝樓), 대월루(對月樓) 같은 누정, 군기청(軍器廳), 훈련청(訓練廳) 등 군사 시설이 들어서면서 영암은 전라도 서남부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특히 성 밖에는 영보역(永保驛)이 설치되어 중앙 정부와 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고, 동문 밖에는 큰 시장이 형성되어 영암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1897년 영암읍지에는 영암 동문 밖 장과 독천장 두 곳의 장시(場市)가 기록되어 있다.

영암읍 서남리에 위치한 성당 계단에 사용된 돌들은 모두 동헌에서 사용하던 돌들이다. 장초석(長礎石)과 장대석(長臺石) 등이 계단으로 재활용되었는데, 이는 수백 년 동안 군수가 정청(政廳)을 오르내리면서 밟고 다니던 돌들이다.


찾아가 볼 만한 영암성의 흔적들

현재 영암읍 중심가에는 영암성의 흔적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영암성당 계단(동헌 건물의 장대석과 주춧돌이 계단으로 재활용됨) ▲무등아파트 뒤편(각자성석(刻字城石)과 성벽 일부 남아있음) ▲영암경찰서 뒤편(성벽 기단부와 내탁부 흔적 일부 보존) ▲영암군청 뒤 백년동 고개(북쪽 성벽의 흔적과 채석장) ▲달맞이공원 구간(성벽 단절 구간을 연결하는 보도교 설치 중)

다음 회에서는 영암성 안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성 안에 있던 주요 시설물들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 무등아파트 뒤편의 각자성석(刻字城石)
선호성 기자 opennews@open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