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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학계리 주민 희생사건
학계리 광암마을은 인민군 점령기에 군경가족이 다수 몰살되는 참화를 겪었다.1) 이러한 이유로 ‘우익촌’으로 알려져 있는 광암마을을 토벌하러 영암경찰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당시 영암경찰은 금정면 토벌작전에 집중한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 경찰이었던 ○○○(당시 22세)에 의하면 광암마을은 해남과 영암의 경계에 있는 흑석산 아래 마을이라 해남경찰대가 흑석산 토벌을 하면서 미수복 지역인 광암마을로 내려오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해남경찰대가 학산면으로 토벌 나왔다는 사실은 앞서 기재한 「한국경찰대 일일 적 동향보고서」(1950.11.29.)에서도 확인된다.2) 이 보고서상의 날짜는 진술인들이 이야기하는 사건일자와 2일간 차이가 있지만 학산면 상월리와 학계리 광암마을은 3.2km 정도 떨어진 마을로 그 무렵 해남경찰이 학산면에서 토벌작전을 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 12월 1일 대부분의 주민들은 피난을 나갔지만 장재동은 군인가족이라 안심하고 마을에 남아 있다가 흑석산 토벌작전 중 마을로 들어온 해남경찰대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해남군 계곡면 방향으로 끌려가다 ‘재정골’에서 살해되었다.
광암마을 주민인 참고인 현창식(당시 26세)은 “장재동은 동생이 군인이라서 피난 가지 않았는데 해남경찰들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붙잡혀 계곡면으로 끌려가다 죽었다. 시신을 이장할 때 보니 머리가 다 부서져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장재동의 제적부에는 사망일자가 “1950년 10월 22일”로 되어 있어 사건발생일(음력)과 일치한다.
노송리 주민 신용수 연행 후 행방불명된 사건
신용수의 동생 신부길은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전쟁이 나자 영암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7월 하순 금정면에서 보도연맹 사건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3) 1950년 11월 26일 신용수는 밭에서 주민 최병호(당시 70대)와 함께 보리를 파종하다가 경찰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송내외마을 주민 참고인 최락정(당시 26세)은 “숙부(최병호)는 당시 70대 노인이라 안 잡아가고 신용수만 끌고 갔다고 한다. 나는 신용수와 동갑인데 그 당시 우리 또래는 대부분 금정으로 피난을 갔지만 신용수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보리를 간다고 밭에 있다가 경찰에게 끌려갔다”고 진술하였다.
신용수의 동생인 신성수(당시 15세)는 “형은 보리를 갈려고 지게에 퇴비를 짊어지고 밭으로 갔다가 경찰에게 붙들려갔고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당시가 무법천지라 무서워서 시신을 찾아보지도 못했다”고 진술하였다.
조사결과 신용수는 1950년 11월 26일 송내외마을 일대를 수색하던 경찰에게 연행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이 무렵 젊은 남자 대부분이 금정면으로 피신했다는 정황으로 보면 경찰은 마을과 떨어진 진등재 밭에서 일하는 신용수를 의심하여 연행한 것으로 보인다. 신용수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였으나 연행되는 것을 본 목격자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경찰에게 연행된 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운암리 주민 희생사건
송석정 주민들은 경찰이 진주할 무렵 군경과 좌익, 인민군 양쪽을 피해 피난을 나갔다가 다음해 1951년 3∼4월경 마을이 안정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왔다.
신복현의 가족은 1950년 가을 친척이 있는 나주 세지면으로 피난을 나갔다. 1951년 3월경 신복현은 아들 신영민을 데리고 다른 가족보다 앞서 영암 덕진면으로 돌아오던 중 금강리 남성촌 꿀산에서 경찰에게 붙들려 영암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영암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신복현 부자는 1951년 3월 10일 영암 회문리 뒷산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같은 마을 주민인 참고인 신영효(당시 17세)는 “신복현(9촌 당숙뻘)은 이발 기술이 있어서 마을주민들 머리를 깎아주기도 하였다. 경찰에게 붙들렸을 때 이불 짐 안에 이발 가위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의심받은 것 같다. 당시는 특별한 죄가 없어도 봇짐을 지고 왔다 갔다 하면 빨갱이 연락병으로 의심하여 죽일 때였다”고 진술하였다.
신복현과 신영민의 제적부에는 “1951. 4. 10. 영암면 회문리 뒷산에서 사망”으로 기록되어 있어 날짜는 실제사망일 3월 10일과 한 달 차이가 있으나 사망장소는 회문리 뒷산으로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시신은 가족에 의해 수습되었다.
다음에 계속
1) 참고인 ○○○ 진술조서(2008.7.24.) .“나와 ○○ 당숙은 경찰이었는데 인공 때 가족을 다 잃고 집도 다 타버렸다.”; 참고인 현창식 진술조서(2008.6.26.). “제 작은아버지나 외숙들은 지방좌익, 유격대에게 몰살 당하였다.”
2) 「한국경찰대 일일 적 동향보고서」. “1950.11.29. 오전 10시 해남경찰서 1개 소대와 영암 2개 이상의 소대가 학산면 상월리 부근에서 소탕작전을 벌여 적 30명을 죽이고 소 1마리와 상당한 양의 전리품을 노획하였다.”(1950년 12월 3일자 보고).
3) 신부길 희생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된 사건으로 보도연맹 사건으로 분류되어 집단희생조사국 조사 3팀에서 조사개시되어 조사 진행 중인 사건이다.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6.09.29(화) 07: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