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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영호리 주민 희생사건
도포지서는 1950년 10월 31일경 수복되었는데 다른 지역보다 수복이 비교적 빠른 편이었다.1) 그러나 당시 경찰은 수복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일이 있어 주민들은 피난을 다녔다.
수복 직전인 10월 27일 박찬익은 나락을 가지러 마을 뒷산 아래에 있는 논에 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김영태는 낮에 산으로 피난을 나갔다가 석양 무렵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마침 인근 수색작전을 마치고 돌아가던 경찰이 이들을 발견하고 총격을 가했다. 이들과 함께 같은 회호정마을 주민 1∼2명이 마을 뒷산 부근에서 사살되었으나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박찬익·김영태 등 2명이다.2)
사흘 뒤인 10월 30일 박찬익의 동생 박금수는 누나(박연임)가 있는 시종면으로 피난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을 부근에서 경찰에게 발각되어 사살되었다.
같은 마을 주민인 참고인 김병원(당시 23세)은 “그때는 일도 제대로 못 했다. 낮이면 죄 없어도 도망을 다녔다. 교전은 없어도 경찰이 경찰 유가족과 함께 다니면서 무고한 주민들을 죽이던 시절이라 주민들은 무서워서 인근 산으로 피난을 다녔다. 경찰은 무서워서 도망가는 사람에게 총을 쏘았다. 도포면이 완전 수복되기 전 경찰이 왔다 갔다 할 때 박금수·박찬익 형제나 김영태 등 많은 주민들이 피난 다니다 경찰에게 걸려 사살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가족과 친척에 의해 모두 수습되었다. 이 중 박찬익·김영태의 제사일은 음력으로 9월 16일(양력 10월 26일)이다.
제적부에는 박찬익은 “1950년 9월 6일 사망”, 김영태는 “1950년 9월 5일 사망”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금수는 “1950년 9월 20일(양력 10월 30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실제 사망일과 일치하였다.
회호정 우물 앞 사건
경찰은 빨치산이 마을을 다녀간 후 영호리 회호정 주민들을 마을 입구에 있는 우물 앞에 세워놓고 모인 주민 중 박찬흥·김길수·나상례를 사살하였다. 이때 나상례가 업고 있던 김선홍(당시 2세·나상례의 아들)3)도 사망하였다.4)
회호정 주민 ○○○(당시 24세)은 “입산자 몇 사람이 영호리 회호정으로 내려왔다. 그중에 회호정 출신인 ○○○은 마침 마을회의를 하고 있던 박찬흥·김길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 빨치산들은 마을에서 소 2마리를 끌고 돌아갔다. 그런데 신고가 들어갔는지 조금 후 경찰이 마을에 들어와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논에 모아놓고 그중 박찬흥·김길수와 ○○○의 부인(나상례)5)을 사살하였다”고 진술하였다.6)
제적부에는 박찬흥이 “1950년 12월 25일 사망”으로 기재되어 있어 실제사망일의 음력과 일치하였다.
이 사건의 희생자로 신원이 밝혀진 희생자는 박찬흥·김길수·나상례·김선홍 등 4명이다.
미암면 신포리 김대철 희생사건
미암면은 1950년 12월 24일경 수복된 것으로 추정된다.7) 경찰은 미암면에 진주하면서 대부분의 주민을 부역자로 의심하였다. 주민들 대다수는 조사를 받거나 자수를 하였다.
김대철(당시 29세)은 인민군 점령기에 신포리 기동마을 책임을 맡았으나 ‘죄가 없고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여 입산하지 않고 집에 남아 있었다. 수복 후 그는 경찰의 출두명령을 받고 춘동리 용흥리에 있는 미암지서로 나갔다. 김대철은 구금되어 있는 동안 가족들이 면회를 했으나, 구금 2주 후인 1951년 1월 13일 사살되었다.
참고인 장우례(여·당시 21세)는 “인공 때 사람들이 억지로 시아주버니(김대철)에게 마을이장을 시켰다. 수복 후 미암지서에 갇혀 있을 때 시어머니가 면회를 가니 경찰이 ‘당신 아들은 죄가 없으니 내일 나갈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1월 13일 용흥마을 바닷가로 끌려가서 사살되었다”고 진술하였다.
김대철의 제적부에는 “1950년 12월 5일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그의 제사일(음)과 일치하였다. 시신은 희생자의 가족들이 수습하였다.
다음에 계속
1) 영암경찰서 경무과 소장 「퇴직자이력서철」에서 확인한 순경 조형기의 기록에는 ‘1950년 10월 31일 도포지서 명’이라고 기록되었다.; 참고인 ○○○ 진술조서(2008.11.4.).
2) 참고인 손옥초 통화보고서(2008.12.19.). “시숙(박찬익)은 결혼했지만 자식은 없었다. 그날 나락 짐 지러 들에 갔다가 갑자기 경찰이 사방에서 뚱땅뚱땅 총을 쏘아 돌아가셨다. 같은 날 마을사람 몇 분이 같이 죽었는데 제사를 같은 날 3집이 지내고 있다. 김창수의 부친도 그날 돌아가셨다.”; 참고인 김병원 통화보고서(2008.12.19.). “그때는 주민들이 피난 다니다 경찰에 걸리면 죽었다. 옆집에 살던 나보다 10살 연상의 김영태는 낮에 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석양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을을 거쳐 가던 경찰에게 걸려 사살되었다. 박찬익도 마을 뒷산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3) 참고인 ○○○ 통화보고서(2008.8.6.). “○○○는 ○○○(김선홍)을 업고 있었는데 ○○도 그때 죽었다.”
4) 참고인 ○○○ 진술조서(2008.6.27.); 참고인 ○○○ 통화보고서(2008.8.6.); 참고인 손옥초 통화보고서(2008.12.19.). “남편(박찬흥)이 우물 앞에서 사살되었지만 나는 가서 보지도 못했다. 내가 아들 박영길(신청인)을 임신한 상태라 남편의 시신을 못 보게 하였다. 결국 유복자를 낳았다. 그 일로 나는 심장병에 걸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어 죽을 것 같다. 너무 원통하고 억울하다.”
5) 신청인 ○○○ 진술조서(2007.5.15.). “마을에 입산한 사람이 왔다는 정보를 듣고 경찰이 마을에 들어와 입산한 사람 ○○을 총살한 적이 있었다.”; 참고인 ○○○ 진술조서(2008.8.13.). “가족 중에 입산자가 있으면 가족을 데려와 죽이기도 했다.”
6) 참고인 ○○○ 진술조서(2008.6.27.). “나는 그날 마을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그 자리에 나갔던 주민들이 많아서 사건내용을 잘 알고 있다.”
7) 영암경찰서 경무과 소장 퇴직자이력서철에 의하면 서복동과 정일국은 ‘1950년 12월 24일 미암지서 근무 명’을 받은 점으로 미루어보아 미암면의 수복은 1950년 12월 24일로 추정된다.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6.09.29(화) 07: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