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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도갑리 박현구 희생사건
도갑리 평리마을 박현구의 아들 박준재(당시 22세)는 “부친은 좌익과 관련된 조직에 가입한 일로 모함을 받았다. 집 마루 밑에 일제 강점기 때 쌀 공출을 피하려고 파놓은 굴이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경찰이 굴에 사람을 감춰주었다며 부친을 지서로 연행한 후 죽정마을과 월암마을 경계에 있는 둑에서 사살하였다”고 진술하였다.
평리마을 참고인 ○○(당시 16세)과 ○○○(당시 14세)은 “박현구는 빨치산한테 무엇을 해주었다는 모함을 받고 경찰에 연행된 후 살해되었다”고 진술하였다.
박현구의 시신은 가족에 의해서 수습되었고 제사는 7월 19일에 지내고 있다.
박현구의 제적부에는 ‘1950년 3월 19일 사망’으로 기재돼 있으나 족보(1960년 刊)에는 ‘1949년 7월 20일 졸’로 기재돼 실제 사망일과 일치하였다.
조사결과 평리마을 박현구는 빨치산 협조 혐의로 경찰에 연행된 후 사살된 것으로 판단된다.
도갑리 이삼만 희생추정사건
이삼만은 좌익활동을 하다가 광주에 사는 친구 박찬호의 집에 숨어 있던 중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군인에게 ○○○와 함께 연행되었다고 한다.
이날 같이 연행되었던 참고인 ○○○(당시 22세)는 “○○○ 집에 이삼만이 숨어 있었는데 신고가 들어갔는지 군 정보과에서 나왔다. 내가 마침 그 집에 갔다가 같이 연행되었다. 다행히 신고한 사람이 나는 무고하다고 말해줘 풀려나왔다. 하지만 이삼만은 빨치산 아지트를 대라고 두들겨 맞았는데 월출산 토벌작전 때 죽었을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같은 마을 참고인 ○○(당시 16세)은 “이삼만은 친구(○○○) 집에 갔다가 붙잡혀서 영암경찰서에서 고문을 받았다. 이후 어디에서 죽였는지 몰라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고 진술하였다.
같은 마을 참고인 ○○○(당시 14세)도 “이삼만은 반란군이라고 경찰에게 연행되어 죽었다”고 진술하였다.
이삼만의 아들 이윤헌(당시 6세)은 “부친은 누군가에게 불려 나간 뒤 행방불명되었다는 말을 모친에게 들었을 뿐 희생경위는 모른다”고 진술하였고, 이삼만의 조카 ○○○(당시 20세)은 “이삼만이 월출산에서 경찰에게 죽었지만 좌익활동 여부는 모른다”고 진술하였다.
이삼만의 제적부에는 ‘1960년 12월 10일 사망’한 것으로 기재돼 있었다.
조사결과 함께 연행되었던 ○○○의 진술과 ○○의 진술로 보아 이삼만은 광주에서 군인에게 연행된 후 영암경찰서에 신병이 인계되었고,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이삼만이 월출산에서 경찰에게 죽었다는 진술은 있었으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추정’ 희생자로 분류하였다.
도갑리 최용정 희생추정사건
도갑리 평리마을 최용정에 대해 같은 마을 참고인 ○○○(당시 22세)는 “최용정은 평리 사람으로 한국전쟁 이전에 경찰에게 죽었다고 들었다. 유족은 없다”고 진술하였다.
역시 같은 마을 참고인 ○○(당시 16세)은 “최용정은 3형제 중 둘째였다. 최용정의 큰형(최용호)이 한국전쟁 이전에 학도유격대 활동을 하여 경찰이 최용호를 잡으려고 동생 최용정과 용강을 붙잡아 구림 가는 샛길(학암마을 부근)로 끌고 가 총살하였다. 시신은 사촌 최대원이 수습하였을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군서면사무소에 최용정의 제적부를 요청했으나 최용정의 형제가 모두 죽고, 호주와 본적지 주소를 알 수 없어 입수하지 못했다.1)
참고인들의 진술로 보아 최용정은 형(최용호)의 적대행위 때문에 경찰에 지목돼 연행되던 중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2) 유족을 찾지 못해 제사일 등을 확인할 수 없어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었으나, 참고인들의 진술이 모두 ‘한국전쟁 이전’이라 하였고, 형이 유격대 활동을 하였다는 진술로 보아 1948년 여순사건 이후인 1949년경으로 추정된다.
다음에 계속
1) 신청인 최재상(2009.2.23)과 군서면사무소(2009.2.24; 2010.5.18)에 최용정의 제적부를 제출, 발급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회신이 없었다.
2) 최용강(미신청)은 최용정과 같이 희생되었다고 진술한 참고인이 ○○ 1명뿐이어서 희생자로 판단할 수 없었다.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6.09.29(화) 07: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