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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한국전쟁 발발 이후 사건)
도갑사 부근 이만석 등 6인 희생 및 희생추정사건
도갑산(375.8m)은 영암의 군서면, 영암읍, 강진군에 걸쳐 있는 월출산(月出山: 809m) 남서쪽 끝의 산봉우리이다. 기슭에는 고찰 도갑사(道岬寺)가 있는데 도갑산은 골짜기가 많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인들에 진술에 의하면 주변 무안, 함평, 해남, 강진, 진도 등의 빨치산은 이들 지역이 수복되자 지리산 등으로 빠져나가며 월출산을 경유하였다고 한다. 군서면 동구림리와 서구림리는 1950년 10월 17일 ‘구림 첫포위 작전’ 등을 거쳤지만 도갑리는 경찰의 치안이 미치지 않자 경찰은 1950년 11월 12일 전후로 도갑사 부근에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도갑리 주민들은 ‘구림 첫포위 사건’ 때 마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이 무차별적으로 사살된 일이 있어서 총소리가 나자 골짜기로 피난을 나갔다. 이날 도갑산 주변으로 피난을 나갔던 동구림 주민 최가웅(당시 54세), 도갑리 주민 이만석(당시 42세), 최덕례(여·당시 16세), 박귀님(이명 박일례·여·당시 20세), 문규철(당시 17세)과 죽정마을 집에서 경찰에게 연행된 김여임(여·당시 18세) 등이 월출산(도갑사 주변)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참고인 이용우(당시 12세·이만석의 아들)는 “1950년 11월 12일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총소리가 나서 죽정마을 뒷산(속칭 문산)으로 피신하는 어른들을 뒤쫓아 도망을 갔다. 몇 주 전에 구림 첫포위 사건으로 주민 70~80명이 한꺼번에 죽었기 때문에 총소리가 나자 주민들 대부분이 겁을 먹고 산으로 피신을 갔다. 바위 틈, 골짜기마다 사람들이 머리만 안 보이게 숨었는데 경찰이 ‘이놈 나와라’ 하고 소리 질렀다. 경찰이 주민들을 평평한 곳에 모아놓고 ‘왜 도망갔냐’며 어른들을 구타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죽정마을 참고인 최홍(당시 17세)은 “1950년 11월 12일 부친(최규상)도 산에서 군인에게 몰렸다. 군인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한 뒤 몇 사람을 뽑아서 노획물을 영암경찰서로 지고 가게 했는데 부친도 짐을 옮기는 심부름을 하고 풀려났다. 그러나 그날 작전 중에 걸린 주민 몇 명이 사살되었다”고 진술하였다.1)
이만석과 최덕례는 죽정마을 뒷산 ‘성기골’ 주변에서 10m 간격을 두고 경찰에게 사살되었고 이들의 시신은 나란히 발견되어 가족과 주민에 의해 수습되었다고 한다.
이만석의 아들 이용우(당시 12세)는 “그날 아버지도 총소리가 나니까 산으로 피신을 하였다. 마을사람들이 현 왕인박사 능 위 골짜기(속칭 ‘성기골’)에서 부친의 시신과 10m 떨어진 곳에서 최형구의 누나(최덕례) 시신을 찾아 그곳에 돌담을 만들어 매장하였는데 나중에 이장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최덕례의 동생 최형구(당시 12세)는 “아침에 누나와 마을 뒷산으로 피난을 나갈 때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는데 누나는 그냥 피신을 가고 나만 집으로 돌아갔다. 도중에 마을에서 징소리가 들려 다시 누나와 피신했던 곳으로 돌아가서 누나를 불렀는데 누나가 대답을 하더니 나중에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누나의 시신과 이만석의 시신은 ‘성기골’에서 수습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이만석의 희생사실에 대해 죽정마을 참고인 ○○○(당시 19세)·○○(당시 17세)의 진술이 일치하였고 최덕례의 희생사실에 대해서는 죽정마을 참고인 ○○(당시 17세)·도갑사마을 참고인 ○○○(당시 13세)의 진술이 일치하였다.
김여임(여), 최가웅, 문규철, 박귀님(여)은 도갑사 부근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고 한다.
이중 최가웅과 김여임(여)의 시신은 나란히 발견되어 수습되었다고 한다. 도갑사마을 참고인 ○○○(당시 13세)은 “군경 합동작전이 들어오자 주민들이 산으로 피난을 나가는데 갑자기 경찰의 총격을 받아 죽정마을 주민 등 피난민들이 여럿 사살되었다. 최가웅은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는데 김여임과 시신이 나란히 발견되었다. 그날 교전은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김여임의 동생 김상집(당시 16세)은 “당시 우리 집에는 여러 가족이 피난을 와 있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월출산 등으로 피신하고 집에는 어린이와 노인들만 남아 있었다. 어머니가 누나는 죄가 없으니 피신할 필요가 없다고 집에 있도록 했는데 갑자기 경찰이 집으로 들이닥쳐 누나와 16세가량의 여자 등 2명을 끌고 나갔다. 같이 끌려갔던 여자는 나이가 어려서 죽이지 않았는지 다시 돌아와 누나가 경찰에게 사살된 장소를 알려 주어 아버지가 누나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생환한 사람의 신원은 확인할 수 없었다.
김여임의 희생사실에 대해서 죽정마을 참고인 ○○○·○○의 진술이 일치하였다.
최가웅의 며느리 김분임(여·당시 17세)은 “결혼한 후에 시어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시아버지 최가웅은 먼저 피신한 둘째딸 최경례(당시 19세)가 걱정되어 뒤쫓아 가다 도갑사마을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고 한다”고 진술하였다.2)
죽정마을 참고인 ○○(당시 17세)은 “최가웅 등 주민들이 도갑산 골짜기로 피난을 갔다가 군경에 사살되었다”고 진술하였다.
그날 박현기의 큰딸 박귀님은 도갑사 가는 길에서 군경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여·당시 20세)는 “나와 동갑인 박귀님은 결혼하여 임신했는데 경찰이 진주할 무렵 경찰에게 죽었다. 박귀님은 소년단 책임자를 했었는데 그것 때문에 죽였는지는 모르겠다”고 진술하였다.
박귀님의 사촌오빠 박준재(당시 23세)와 참고인 ○○○(당시 19세)은 “박귀님은 당시 임산부였고 월출산, 도갑사 부근에서 총소리가 나자 피난을 나가다 ‘도갑사 올라가는 길’에서 경찰에 사살되었다”고 진술하였다.
다음에 계속
1) 참고인 최홍은 그날 모친이 자신의 쌍둥이 동생을 출산하였기 때문에 날짜를 기억하고 있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최홍 진술조서(2008.3.13)·통화보고서(2010.5.5)
2) 최가웅의 며느리 김분임은 시아버지인 최가웅의 제사일은 음력 10월 3일이라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김분임 통화보고서(2010.6.2)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6.09.29(화) 07: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