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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도갑리 박승만 희생사건
도갑리 평리마을 박승만은 ‘밤사람’을 도왔다는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었고 군서지서에서 며칠 동안 조사를 받던 박승만은 1951년 4월 21일(음력 3월 16일)경 동호리 지남마을 뒷산에서 사살되었다고 한다.
박승만의 동생 박승환(당시 16세)은 “경찰이 진주하고 빨치산들은 금정면으로 밀려갔는데, 주민들이 빨치산과 연락을 한다고 본 건지 경찰이 형을 지서로 끌고 갔다. 어머니와 형수가 지서로 형의 밥을 날랐는데 경찰은 땅굴을 찾아내라며 형을 동호리 지남마을 산, 동네 대밭 등으로 4~5일간 끌고 다니다 음력 3월 16일에 지남마을 뒷산에서 사살하였다. 아버지와 함께 지남마을 뒷산에서 형의 시신을 수습해서 지게로 져다가 너머 잔등에 묻었다”고 진술하였다.
평리마을 참고인 ○○(당시 18세)은 “박승만은 밥만 먹고 일만 하던 사람인데 집에 있다 경찰한테 붙잡혀 지서로 연행된 후 살해되었다”고 진술하였으며 박승만의 사촌동생 ○○○(당시 13세)도 “박승만은 순하고 어리숙한 분으로 경찰에게 끌려갈 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경찰에게 끌려가 죽었다”고 진술하였다.
박승만의 사망 시기가 한국전쟁 이전이라는 참고인 ○○과 ○○○의 진술이 있었으나 박승만의 족보에는 “1951년 3월 15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고 이는 박승만의 동생 박승환과 아들 박학서(1947년생)가 진술한 박승만의 기일과 일치하여 박승만의 실제 사망일은 1951년 3월 16일로 판단된다.1) 박승만의 제적부에는 “1952년 3월 16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어 연도는 1년 뒤로 기재됐으나 날짜는 실제 사망일과 일치하였다.
조사결과, 박승만은 군서지서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던 중 사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진실규명불능 사건 - 군서면 사건(동구림리 사건)
▲고산마을 최유섭(1925년생)·최선섭(1929년생·이명 최체현) 형제가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진실규명 신청되었다.
최유섭에 대해 참고인 ○○○(당시 21세)·○○○(당시 26세)·○○○(당시 26세)은 최유섭이 1950년 11월경 경찰에 쫓겨 피신 다니다 경찰에게 희생되었다고 진술한 반면 최유섭의 조카 최재윤(당시 10세)·최재상(당시 14세)은 최유섭이 서울 경성방직 근무 중 전쟁이 발발하자 영암으로 내려오다 행방불명되어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진술하였다.2)
참고인 ○○○(당시 27세)도 “최유섭은 좌익운동을 했던 사람이나 누구한테 죽었는지도 모르고 행방불명되어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진술하였다.
최선섭에 대해 최선섭의 조카 최재윤·최재상은 최선섭이 인민군점령기에 가족이 반동으로 몰려 위험에 처하자 가족을 살리기 위해 협조를 하였다며 이러한 이유로 경찰이 진주하자 최선섭은 금정면으로 피신하였다가 1950년 12월경 자수하기 위해 돌아오던 중 경찰의 수류탄 투척으로 사망하였다고 목격자가 알려주어 가족이 시신을 수습하여 부근에 매장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도 “최선섭은 인공 후퇴 이후에 금정면 산에서 경찰에게 죽었다고 들었다”고 진술하였고 참고인 ○○○은 “최선섭은 금정면으로 피신하였다가 토벌작전에 걸려 죽었을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조사결과 최유섭의 경우 사망경위에 대한 유족과 참고인들의 진술이 엇갈리고 있어 최유섭의 사망날짜 및 사망경위를 확인할 수 없었다. 최선섭의 경우는 최선섭이 경찰 진주 무렵에 금정면으로 피신하였다가 경찰의 수류탄에 사망하였다는 진술이 있었으나 최선섭의 사망이 경찰의 불법적인 공권력으로 인한 것인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최유섭·최선섭 사건은 진실규명불능으로 판단된다.
▲동계마을 최종관(1936년생)이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진실규명 신청되었다.
참고인 ○○○에 의하면 최종관은 가족을 따라 금정면으로 피난을 가 있던 중 군경토벌작전 과정에서 모친 박맹순(1898년생)과 함께 사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희생경위는 알 수 없었다.
조사결과 최종관의 죽음이 군경의 불법적인 공권력 행사에 의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어 진실규명불능으로 판단된다.
▲학암마을 최재명(1911년생)은 ‘1948년 11월 22일 영암면 대신리에서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진실규명 신청되었다.
최재명의 사촌동생인 ○○○(당시 31세)·동계마을 참고인 ○○○(당시 16세)·고산마을 참고인 ○○○(당시 23세)·○○○(당시 21세)에 의하면 학암마을 최재명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경찰에 의해 좌익혐의로 쫓겨 피신 다니던 중에 경찰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참고인들의 진술이 전문 수준에 그쳐 최재명이 경찰에 ‘붙잡혀’ 살해된 것인지 토벌과정에서 사살된 것인지 구체적인 사망경위와 사건 정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최재명의 죽음이 경찰의 불법적인 공권력 행사로 인한 것인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어 진실규명불능으로 판단하였다.
다음에 계속
1) 박승환과 박학서에 의하면 박승만의 제사일이 음력 3월 15일이라고 한다. 참고인 박승환 진술조서(2010.3.26); 참고인 박학서 통화보고서(2008.6.11; 2010.4.29)
2) 참고인 최재윤 진술조서(2008.5.21); 최재윤의 조사과정에서 조카 최재상을 전화조사하였고 내용을 최재윤의 진술조서에 기재하였다.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6.09.29(화) 07: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