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해져가는 흔적들

HOME > 기획특집 > 기획특집
희미해져가는 흔적들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2) #11
  • 입력 : 2025. 09.19(금) 10:28
  • 이민정 기자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진실규명불능 사건 - 군서면 사건(서구림리 사건)

▲신흥동마을 최규만(1914년생)1) 은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진실규명 신청되었다.

서호정마을 참고인 ○○○(당시 31세)은 서호정 주민 최규만이 1950년 10월 17일 구림 첫포위 사건 때 경찰에게 희생되었으나 장소를 알지 못한다고 진술하여 최규만은 ‘영암 구림 첫포위 사건’에서 보류되었다.2)

진실화해위원회는 1950년 10월 17일 구림지역에서 영암경찰의 토벌작전으로 최소한 44명 이상의 주민이 희생된 사건을 ‘영암 구림 첫포위 사건’으로 진실규명 결정한 바 있다.3)

최규만의 조카 ○○○(당시 21세)는 “숙부는 인민군점령기에 농민위원장을 지냈는데 구림 첫포위 사건 때 영암경찰서로 연행된 후 경찰에게 희생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의 진술에서 사망장소 및 사망경위가 엇갈렸고, ○○○ 외에 최규만이 ‘첫포위 사건’ 때 희생된 사실을 알고 있거나 ○○○ 외에 최규만이 경찰에게 붙잡혀 영암경찰서로 연행된 것을 목격하였거나 알고 있는 참고인을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최규만의 구체적인 사망경위를 확인할 수 없었다.


▲신흥동마을 최규성(1902년생)은 한국전쟁 때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진실규명 신청되었다.

최규성의 조카 ○○○(당시 16세)와 참고인 ○○○(당시 21세)에 의하면 최규성은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군에게 협조하였다고 한다.4) 이 때문에 최규성은 수복 이후 경찰에 의해 1950년 12월 27일 지금의 고산실업고등학교 자리에서 사살되었다고 한다. 시신은 가족에 의해 수습되었다.

조사결과 최규성의 시신이 수습되었고 최규성이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전문(傳聞) 참고인의 진술은 있으나 사건을 목격한 참고인이 없어 사건의 정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따라서 최규성의 죽음이 경찰의 불법적인 공권력 행사로 인한 것인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어 진실규명불능으로 판단된다.


▲신흥동마을 최규만②(1926년생)이 한국전쟁 때 군경에게 희생되었다고 진실규명 신청되었다.

참고인 ○○○(1928년생)은 “최규만은 빨치산을 따라 금정면으로 피난을 나갔다가 경찰에게 죽었는데 시신도 못 찾았다”고 진술하였고 참고인 ○○○(1930년생)는 “최규만은 의용군이 되어 진주에 갔다가 패잔병이 되어 금정면에서 경찰 포위로 죽었다고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조사결과 ○○○과 ○○○의 진술이 엇갈려 최규만이 금정면으로 피난을 나갔다가 경찰에게 죽었는지 의용군에 입대하여 금정면에서 교전 중 사망하였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진실규명불능으로 판단된다.


▲서구림리 남송정마을 최용호가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군경에 희생되었다고 진실규명 신청되었다.

서구림리 신흥동마을 참고인 ○○○(1930년생)는 “최용호가 자수한 뒤에 밤손님과 연락을 했다고 경찰에게 끌려가 죽었다”고 진술하였다.

최용호(崔龍鎬)의 판결문(1949년 형공 제98호)에는 ‘서구림 최용호(1949년 당시 48세·본적 서구림 368번지)’가 징역 4월형을 받았다고 기록됐다.5)

최용호의 유족을 찾을 수 없어 군서면사무소의 협조로 발급받은 제적부에는 최용호(崔龍鎬)가 ‘1911년생으로 본적은 서구림 358번지’로 기록됐는데 나이와 주소가 판결문과 비슷하여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최용호에 대해서는 ○○○의 진술밖에 없어 구체적인 희생경위는 알 수 없었다. 따라서 진실규명불능으로 판단된다.


▲서호정마을 박춘재(1929년생)는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군경에게 희생되었다고 진실규명 신청되었다.

신흥동 주민 ○○○(1930년생)는 “박춘재는 여순사건 반란군이 월출산으로 오자 이들과 행동을 같이 하던 최○○가 자수를 하면서 아마도 박춘재가 좌익이라고 이름을 불었나 보다. 그래서 군서지서로 연행되었고 경찰에 의해 총살되었다”라고 진술하였으며 서호정 주민 ○○○(1928년생)은 “박춘재는 피난 다니다 경찰에 죽었다”고 진술하였다.

반면 참고인 ○○○(1931년생)은 ”전쟁 이전에 저녁에 누군가 불러내어 나간 뒤 행방불명되었는데 반란군이 데려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진술하였다.

조사결과 박춘재가 경찰에 죽었을 개연성이 있으나 사건경위에 대한 참고인들의 진술이 엇갈리고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진실규명불능으로 판단된다.


▲서호정마을 조재순(여·1933년생)이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진실규명 신청되었다.

조재순에 대해 참고인 ○○○(1930년생)는 “조재순은 한국전쟁 때 피난 다니다 경찰에게 희생되었다”고 진술하였다.6) 참고인 ○○○(1928년생)은 “조재순은 좌익이 끌고 다녔는데 금정면에서 경찰에게 죽었다고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조사결과 참고인의 진술을 통해 조재순이 미혼의 여성이었음은 확인하였으나 유족과 제적부를 찾기 어려웠고7) 조재순이 경찰에 의해 사망하였다는 진술은 있었으나 경찰의 불법적인 공권력 행사로 인한 사망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진실규명불능으로 판단된다.

다음에 계속


1) 서구림리 진실규명대상자 중 동명이인인 2명의 최규만이 있어 1914년생 최규만은 최규만①로 표기하고 1926년생인 최규만은 최규만②로 표기하였다.
2) 참고인 ○○○ 진술조서(2007.4.11); 진실화해위원회, ‘영암 구림 첫포위 사건’ 진실규명 결정(2007.11.20)
3) 진실화해위원회, ‘영암 구림 첫포위 사건’ 진실규명 결정(2007.11.20)
4) ○○○ 진술조서(2008.5.22); 참고인 ○○○는 “최규성은 지아목 사건 때 집안 ○○○가 죽게 된 것을 구출했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 진술조서(2008.5.20); 지아목 사건은 구림마을에서 후퇴하던 지방좌익에 의해 구림리 주민 28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진실화해위원회, ‘영암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 진실규명 결정(2008.12.30)
5) 1949년 형공 제98호(1949년 6월 14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원 판결)
6) 참고인 ○○○ 진술조서(2008.5.20); 참고인 ○○○ 진술조서(2008.5.2); 신청인 최재상에게 ‘희생자의 제적부 및 유족의 연락처 제출 안내’ 편지 발송(진실화해위 문서등록번호 1680041-000238, 2009.2.23)
7) 대표 신청인 최재상에게 진실규명대상자의 제적부와 유족의 연락처를 제출하여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발송하였으나 이에 대한 회신은 없었다. ‘희생자의 제적부 및 유족의 연락처 제출 안내‘(진실화해위 문서등록번호 1680041-000238, 2009.2.23)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