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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덕진면 사건
덕진면은 서쪽으로는 영암면과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금정면과 접해있는데, 금정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해발 약 300m 높이의 산을 넘어가야 한다. 금정면은 인민군 점령기 때 활동했던 인민군, 지방좌익 등의 주요 탈출로 및 은신처가 되었는데,1) 그러한 지리적 배경으로 인해 금정면과 인접한 덕진면에는 영암군이 경찰에 수복된 이후에도 밤이면 빨치산이 나타나 식량 등을 가져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덕진면 주민들은 빨치산에게 협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자주 노출되었다.
이에 덕진면은 금정면과 함께 경찰의 빨치산 토벌작전 대상지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덕진면 주민들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본 조사결과보고서는 1950. 10. 13.~30., 덕진면 영보리, 용산리, 노송리에서 경찰의 부역혐의자 색출과정 및 빨치산 토벌작전 과정에서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을 정리하였다. 사건발생 순으로 사건의 경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덕진면 영보리 신○채 희생 사건(2다-2417-11)
진실규명대상자 신○채(愼○采, 남, 50세, 농사)는 덕진면 노송리 285번지 송내마을에 거주하던 중, 1950. 10. 13.(음력 9. 3.), 경찰의 지시에 따라 마을 입구로 나갔다가 덕진면 영보리 냉천동마을 뒷산으로 끌려가 경찰에게 총살되어 희생되었다.
신청인 신○재(신○채의 아들, 1940년생)의 진술에 따르면, 신○채는 1950. 10. 13.(음력 9. 3.), 덕진면 노송리 송내마을에 거주하는 남자들은 마을 입구로 나오라는 경찰의 지시에 따라 마을 입구로 나갔다가 영보초등학교로 끌려갔고,2) 영보국민학교로 끌려온 남자들과 함께 덕진면 영보리 냉천동마을 뒷산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경찰에게 총살되었다. 신○채의 가족들은 사건 당일은 무서워서 시신을 찾으러 가지 못했다가 며칠이 지나서 신○채의 부인이 마을 남자들과 함께 가서 신○채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신청인 신○재는 그날 경찰들이 마을에 들어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경찰들이 왜 아버지 신○채를 포함한 몇 명을 총살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알지 못하였다.3)
참고인 신○(이웃, 1935년생), 참고인 최○○(이웃, 1936년생)의 진술에 따르면, 신○채는 덕진면 노송리 송내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1950. 10. 벼를 수확할 무렵, 경찰들한테 끌려가서 덕진면 영보리 냉천동마을에서 희생되었고, 신○채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수습되었다.
제적등본에는 신○채가 ‘1970. 3. 15. 본적지(전남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285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4) 족보 『거창신씨세보(居昌愼氏世譜)』에는 ‘○채(○采), 경인(1950. 9. 3.) 종(終)’으로 기재되어 있고,5) 신○채의 제삿날은 사망 전날인 음력 9. 2.이다. 이에 제적등본 상 사망일은 상이하나 족보와 제삿날을 근거로 신○채의 희생일을 1950. 10. 13.(음력 9. 3.)로 판단하였다.
족보에 신○채의 사망일이 1950. 음력 9. 3.로 기재되어 있고, 신○채의 제삿날이 사망 전날인 음력 9. 2.인 점, 1950. 10. 벼를 수확할 무렵 신○채가 희생되었다는 참고인들의 진술, 덕진면 영보리 냉천동마을 뒷산에서 신○채의 시신을 직접 수습한 어머니로부터 관련 내용을 전해 들은 신청인 신○재의 진술을 근거로 할 때, 진실규명대상자 신○채는 1950. 10. 13.(음 9. 3.), 마을 입구로 나오라는 경찰의 지시에 따라 마을 입구로 나갔다가 덕진면 영보리 냉천동마을 뒷산으로 끌려가 경찰에게 총살되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덕진면 용산리 한○용 희생 사건(2다-2124-26)
진실규명대상자 한○용(韓○容, 족보명 한○실, 남, 34세, 농사)은 덕진면 용산리 289번지 당산동마을에 거주하던 중, 1950. 10. 22.(음력 9. 12.), 빨치산과 연락한 것으로 의심을 받아 당산동마을 앞 공터에서 경찰에게 총살되어 희생되었다.
신청인 한○섭(한○용의 아들, 1942년생)의 진술에 따르면, 한○용은 1950. 10. 22.(음력 9. 12.), 아침밥을 먹고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도포면에 있는 밭에서 일하다가 인근 마을 주민으로부터 당산동마을 쪽에서 총소리인지 무슨 소리가 나니 가봐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 한○용이 집에 도착했을 때 집 앞에서 경찰을 만났고, 경찰이 한○용에게 마을 앞 공터로 나가라고 지시하여, 한○용은 몰고 온 소를 외양간에 두고 집에 혼자 남아있던 아들 한○섭(신청인)에게 집에 잘 있으라고 말한 뒤 마을 앞 공터로 나갔다. 한○용의 어머니와 부인은 경찰의 지시에 따라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마을 앞 공터로 나간 후였다. 약 2시간 후, 한○용의 어머니와 부인이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고, 마을 주민들이 한○용의 시신을 들것에 싣고 들어왔다. 한○용의 시신은 그날 집 뒤에 있는 산에 매장되었다. 한○용이 마을 앞 공터로 나갔을 때, 마을 주민 중 한○용이 제일 마지막으로 나가서 주민들이 서 있는 줄의 맨 끝에 섰는데, 경찰이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게 하고는 한○용과 마을 주민 1명(남성, 이름 미상)을 총살하였다고 한다. 사건 이후 마을 주민들이 그날 한○용이 자신의 동생이 한국전쟁 참전군인이라고 말만 했어도 총살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6)
참고인 김○○(이웃, 남, 1933년생)의 진술에 따르면, 한○용은 빨치산과 연락했다는 의심을 받고 경찰에게 총살되었다.
제적등본에는 한○용이 ‘1956. 10. 27. 본적지(덕진면 용산리 289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족보 『청주한씨 제7교대동족보 양혜공파(淸州韓氏 第7校大同族譜 襄惠公派)』에는 ‘○실(○實), 경인(庚寅) 9. 13. 졸(卒)’로 기재되어 있다.7) 한○용의 제삿날은 사망 전날인 음력 9. 11.로, 현재도 신청인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에 제적등본과 족보상 사망일이 상이하나, 족보상 사망일이 제삿날 기준 사망일과 하루 차이가 나고 신청인이 현재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는 점을 근거로 한○용의 희생일을 1950. 10. 22.(음력 9. 12.)로 판단하였다.
사건 당일 신청인 한○섭이 아버지 한○용이 경찰의 지시에 따라 마을 앞 공터로 나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이후 한○용의 시신을 목격한 점, 한○용의 제삿날이 사망 전날인 음력 9. 11.이고 현재까지 신청인이 제사를 지내고 있는 점, 족보에 한○용의 사망일이 음력 9. 13.로 제삿날과 유사한 점, 한○용이 빨치산과 연락했다는 의심을 받고 경찰에게 희생되었다는 참고인의 진술을 통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한○용은 1950. 10. 22.(음력 9. 12.), 덕진면 용산리 당산동마을에 들어온 경찰에 의해 빨치산과 연락한 것으로 의심을 받아 마을 앞 공터에서 경찰에게 총살되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다음에 계속
1) 인민군이 후퇴하자 영암 인근의 6개 군(해남, 강진, 완도, 진도, 영암, 무안 등)에서 인민군과 지방 좌익들이 영암 금정면으로 몰려들었다. 그것은 금정면이 산간 지역으로 남쪽으로 장흥 유치와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화순을 거쳐 곡성-구례로 이어져 지리산과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덕진면 영보는 금정면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인근 지방의 좌익은 대부분 영보를 거쳐 금정면으로 들어갔다. 인민군과 지방 좌익들이 금정면으로 후퇴할 때, 그들은 영보 주민들에게 함께 후퇴할 것을 권하였다. 영보 사람들도 인민위원장과 내무서장을 영보 사람들이 다 맡는 등 영보가 영암의 모스크바라고 알려져 있는 상황에서 마을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는 무슨 화를 당할지 몰랐다. 따라서 영보 사람들은 극소수의 노인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마을 뒤 독갓재를 넘어 금정면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박찬승, 「20세기 전반 동성마을 영보의 정치사회적 동향」, 『지방사와 지방문화』6, 2003, 19쪽
2) 영보초등학교는 1996. 덕진초등학교에 통합되었다.
3) 신청인 신○재 진술조서(2022. 6. 23.) 1946. 광주지방검찰청 장흥지청에서 생산된 『형사사건부(5-2)』에서 진실규명대상자 신○채가 삼림령 위반으로 1946. 7. 23. 벌금 1000원을 받은 사실이 확인되나, 그 외 자료는 확인되지 않아 해당 내용만으로는 구체적인 사건 경위를 확인할 수 없었다.
4) 신○채의 사망신고를 직접 한 신청인 신○재는, “그때 호적을 새로 만들면서 사망신고도 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5) 『거창신씨세보(居昌愼氏世譜)』권4, 1188쪽
6) 나중에 한국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했던 한○용의 남동생이 집에 돌아와 한○용의 희생 소식을 접하고는 경찰서에 가서 이 일을 알아보고자 하였으나 가족들이 말렸다고 한다. 신청인 한○섭 진술조서(2022. 2. 8.)
7) 『청주한씨 제7교대동족보 양혜공파(淸州韓氏 第7校大同族譜 襄惠公派)』23권, 1841쪽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6.09.28(월) 1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