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지 못한 문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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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4) #05
  • 입력 : 2026. 03.27(금) 10:35
  • 이민정 기자

위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윤○수 가족 희생 사건

진실규명대상자 박○아(윤○수의 모친), 윤○수, 김○산(윤○수의 처), 윤○호(윤○수의 아들), 김○심(윤○수의 며느리), 윤○례(윤○수의 손녀), 윤○득(윤○수의 손자), 윤○례(윤○수의 손녀), 윤○식(윤○수의 손자), 윤○정(윤○수의 손자), 윤○례(윤○수의 손녀), 윤○호(윤○수의 아들), 조○심(윤○수의 며느리), 윤○호(윤○수의 아들), 윤○숙(윤○수의 딸), 윤○호(윤○수의 아들), 윤○호(윤○수의 아들), 윤○일(윤○수의 손자) 등 일가족 18명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경찰과 접촉하였다는 이유 등으로 1950. 10. 31.(음 9. 21.) 지방 좌익에 의해 학산면 독천리 장정산 골짜기(현 동아보건대학교)로 끌려가 희생되었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였고, 제삿날은 음력 9. 20.이다.

윤○수의 손자인 신청인 윤○진(당시 12세)은 할아버지 윤○수, 큰아버지 윤○호, 아버지 윤○호가 ‘논 50마지기, 밭 60마지기 정도’ 농사를 지어 부유한 편이었다고 진술하였다. 신청인은 당시 마을 앞에서 마을 친구 박○준1) 과 놀고 있다가 본인의 집, 할아버지 윤○수의 집, 친구 박○준의 집을 빨치산들이 둘러싼 것을 목격했고, 그 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진외가로 피신하였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 신청인을 포함한 윤○수 가족이 좌익들에 의해 마을창고에 갇혔다가 마을 주민들이 창고 문을 열어준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20여 일 뒤 윤○수 가족은 집으로 찾아온 좌익들에 의해 희생당했다. 신청인 윤○진과 친척이 윤○수 일가의 시신을 수습했는데, 박○아의 시신은 왼쪽 팔이 없는 상태였고, 시신에는 죽창과 칼에 찔린 자국들이 있었다.

윤○수 가족의 희생 사실은 제적등본과 『영암 피해자 현황조사(2007)』에서 확인된다. 제적등본에는 윤○수 가족 17명2) 이 ‘1950. 11. 7. 학산면 독천리 장정산’에서 사망했다고 등재되어 있다.

『영암 피해자 현황조사(2007)』에는 ‘(신청인 윤○진의) 조부가 마을의 유지이자 부호이며 백부(윤○호)가 경찰서에 출입한다는 이유로 1950년 음력 9월 20일 마을 뒷산 언덕 골에서 지방 좌익세력에 의해 일가족 24명이 구타, 학살당했다’고 기재되어 있다.3)

『영암 피해자 현황조사(2007)』에 윤○수 가족의 희생 사건이 기재되어 있고, 같은 날 끌려가서 희생당한 ’박○안 가족 희생 사건‘의 사망일 등이 신청인의 주장과 일치하며, 사건 당시 12세로 친척과 함께 시신을 수습했던 신청인의 진술이 희생 경위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어서 윤○수 가족 18명이 좌익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다음에 계속


1) 박○준은 ‘학산면 독천리 박○안 가족 희생 사건(2마-4936, 2마-4937, 2마-4938, 2마-4939, 2마-4940, 2마-4941, 2마-4942)’의 신청인으로 조사 당시 병원에 입원 중이었기 때문에 참고인 진술조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
2) 신청인 윤○진 진술조서(2021.12.22.); 신청인 윤○진의 동생 윤○일은 사건 발생 당시 3, 4세였고, 호적에 등재되지 않았다. 신청인은 ‘○일이 낳고 어머니가 임신을 해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며칠 안에 애기를 낳는다고 할 때였다.‘라고 진술했다.
3) 진실화해위원회, 앞의 책, 2007, 25쪽.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