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초고압 송전탑 건설에 반대해 온 주민 대표들을 만나 “한 달간 입지선정위원회 절차를 보류하고 민주적 절차 강화와 대안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송전선로를 둘러싼 갈등이 전국으로 번진 끝에 나온, 정부 차원의 첫 응답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나흘 뒤인 12일, 영암군은 345kV 신해남-신장성 송전선로 건설사업의 환경영향평가항목 결정내용을 공고하고 주민의견 수렴 절차에 들어갔다.
입지선정 절차와 환경영향평가 절차는 법적으로 다른 트랙이다. 영암군의 공고가 위법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절차가 적법한가와 주민이 그 절차를 신뢰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다. 한쪽에서는 “속도를 늦추고 대안을 찾겠다”는 말이 나오고, 다른 쪽에서는 다음 단계 절차가 예정대로 돌아간다. 9개월간 이 사안을 지켜본 주민들이 이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문제의 뿌리는 더 깊은 곳에 있다. 이번 의견수렴의 대상은 노선 그 자체가 아니라 환경영향평가의 대상지역과 항목·범위·방법이다. 노선은 이미 지난해 12월 7차 입지선정위원회에서 최적경과지가 확정된 것으로 정리돼 있다. 주민들이 줄곧 “다 정해놓고 무슨 의견수렴이냐”고 물어온 바로 그 구조가, 환경영향평가 단계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노선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금정면과 신북면 주민의 대표는 이번 환경영향평가협의회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영암군을 대표하는 주민위원은 영암읍 이장단장 한 사람뿐이었다.
제도 자체가 속도를 전제로 짜여 있다는 점도 짚어야 한다. 이 사업이 적용받는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은 환경영향평가 협의 기간을 45일로 못 박고, 그 안에 통보가 없으면 협의가 끝난 것으로 간주한다. 관할 지자체가 평가서 초안 공람을 20일 안에 하지 않으면 사업시행자인 한전이 그 절차를 대신할 수 있도록 길도 열어두었다. 절차를 빠르게 진행하기 위한 장치들이 촘촘한 만큼, 주민이 의견을 모으고 행사할 시간과 통로는 그만큼 좁아진다. 정부가 입으로는 “속도를 늦추겠다”고 말해도, 제도가 여전히 속도전 위에 서 있다면 그 말의 무게는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장관의 ‘한 달 보류’ 발언이 빈말이 되지 않으려면, 그 한 달은 입지선정위원회 회의 일정만 멈추는 시간이어서는 안 된다. 환경영향평가를 비롯한 후속 절차 전반에서 무엇을 어떻게 점검할 것인지, 주민의 의견이 실제로 어느 단계에서 반영될 수 있는지를 분명히 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보류’는 갈등을 잠시 미뤄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영암 주민들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환경영향평가항목에 대한 의견 제출은 6월 1일까지, 평가서 초안 공람은 6월로 예정돼 있다. 영암군과 한전은 이 절차가 형식적 통과의례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주민이 낸 의견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다뤄지는지, 그 경로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먼저다. 절차의 적법성은 주민의 신뢰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영암열린신문 opennews@openmedia.co.kr
2026.09.28(월) 1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