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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진실규명대상자 김○문, 조○탁, 조○석(2다-2124-42, 신청인 조○구)
진실규명대상자 김○문(金○問, 여, 1917년생, 농사), 김○문의 첫째 아들 조○탁(趙○卓, 남, 1932년생, 농사), 김○문의 둘째 아들 조○석(趙○石, 남, 1936년생, 농사)은 1950. 10. 30.(음력 9. 20.) 영암면 회문리 회의촌마을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신청인 조○구(1947년생, 김○문의 아들)의 진술에 따르면, 김○문은 남편, 자녀들과 영암면 회문리 93번지 회의촌마을에서 거주하였다. 1950. 10. 30.(음력 9. 20.) 김○문, 조○탁, 조○석은 영암면 회문리 회의촌마을 앞에서 경찰에 의해 총살되었다. 그날 김○문의 남편은 집안의 선산 관련 일을 보러 시종면에 있는 친척집에 갔고, 김○문의 다른 자녀들(신청인 조○구, 신청인의 셋째 형과 누나)은 나이가 어려서 무사하였다. 나중에 집에 돌아온 김○문의 남편이 김○문, 조○탁, 조○석의 시신을 수습하여 회문리 회의촌마을 뒤 야산에 매장하였다. 제삿날은 희생일인 음력 9. 20.이다.1)
참고인 하○○(1930년생, 이웃)의 진술에 따르면, 경찰이 회문리 회의촌마을에 와서 인민군 점령기 때 좌익활동 했던 사람의 처가 가족을 총살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같은 마을에 살던 김○문과 그 아들 2명이 그들과 관련이 없었음에도 경찰에 의해 총살되었다.2)
김○문 등 3명의 사망일이 제적등본에는 ‘1950. 12. 20. 본적지에서 사망(1953. 1. 6. 신고)’으로 기재되어 있고, 족보에는 3명 모두 등재되어 있지 않다.3)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 진실규명대상자 김○문 등 3명의 시신이 영암면 회문리 회의촌마을에서 김○문의 남편에 의해 수습된 점, (2) 세 사람의 시신을 수습한 아버지로부터 관련 내용을 전해 들은 신청인 조○구의 진술이 구체적인 점, (3) 김○문 등 3명의 제삿날이 사망일인 음력 9. 20.인 점, (4) 제적등본에 기재된 김○문 등 3명의 사망일이 실제 사망일(1950. 10. 30.)과 약 2달 차이가 나지만 모두 1950. 12. 20.로 기재된 점, (5) 김○문 등 3명이 희생된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참고인의 진술 등을 종합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김○문, 조○탁, 조○석은 1950. 10. 30.(음력 9. 20.) 좌익활동한 사람의 가족을 찾기 위해 회의촌마을에 온 경찰에 의해 영암면 회문리 회의촌마을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진실규명대상자 하○훈, 하○칠(2다-2417-69, 신청인 하○진)
진실규명대상자 하○훈(河○燻, 남, 1926년생, 영암중학교 음악교사4)), 하○훈의 동생 하○칠(河○七, 남, 1931년생, 영암중학교 학생)은 1950. 11. 15.(음력 10. 6.), 영암면 교동리 길가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신청인 하○진(1949년생, 하○훈의 아들)의 진술에 따르면, 하○훈과 하○칠은 영암면 역리 250번지에서 가족들과 거주하였다. 하○훈은 영암중학교 교사였던 관계로 인민군 점령기 때 협조한 일이 있어 영암군이 경찰에 수복된 이후 영암경찰서에 가서 자수했고, 경찰서에서 3일 정도 조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며칠 후 경찰이 하○훈의 집에 와서 하○훈을 끌고 갔고, 그 모습을 본 하○훈의 동생 하○칠이 형을 왜 잡아가냐고 하자, 경찰이 하○칠도 끌고 갔다. 하○훈이 경찰에게 ‘동생은 살려달라’고 하였지만 두 사람 모두 경찰에게 끌려가 영암면 교동리 길가에서 총살되었다.
소식을 들은 하○훈과 하○칠의 아버지가 두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여 영암면 망호리 선산에 매장하였다. 하○훈과 하○칠의 제삿날은 사망 전날인 음력 10. 5.이다.
참고인 하○○(1930년생, 친척)의 진술에 따르면, 하○훈은 교사였던 관계로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군의 지시로 사람들에게 노래 가르치는 일 등을 한 적이 있는데, 이후 도망가거나 입산하지 않고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훈과 하○훈의 동생 하○칠이 집에 찾아온 경찰에 의해 영암면 교동리 길가(현 영암문화원 부근)에서 총살되었다. 그날 두 사람의 어머니가 뒤를 따라가니 경찰이 더 따라오지 말고 집으로 가라고 하여 어머니가 뒤돌아서 가니 경찰이 두 사람을 총살하였다.5)
하○훈과 하○칠의 사망일이 제적등본에는 ‘1954. 2. 24. 본적지에서 사망(1954. 8. 28. 신고)’으로 기재되어 있다. 족보에는 하○훈이 ‘1950. 9. 23. 졸(卒)’로 기재되어 있고, 하○칠은 등재되어 있지 않다.6)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 진실규명대상자 하○훈과 하○칠의 시신이 영암면 교동리 길가에서 가족들에 의해 수습된 점, (2) 하○훈과 하○칠의 시신을 수습한 가족으로부터 관련 내용을 전해 들은 신청인 하○진의 진술이 구체적인 점, (3) 하○훈과 하○칠이 희생된 경위를 인지하고 있는 참고인의 진술이 구체적인 점, (4) 두 사람의 제삿날이 희생 전날인 음력 10. 5.인 점, (5) 족보에 기재된 하○훈의 사망일자가 1950. 9. 23.로 실제 사망일의 음력 날짜(음력 10. 6.)와 약 10일 차이로 근접한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하○훈은 인민군 점령기에 사람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었다는 이유 등으로 동생 하○칠과 함께 경찰에게 붙잡혀 1950. 11. 15.(음력 10. 6.) 영암면 교동리 길가에서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다음에 계속
1) 신청인 조○구 진술조서(2022. 12. 12.) 신청인 조○구는 그날 마을에 온 사람들이 누구인지, 누가 진실규명대상자들을 총살하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참고인의 진술을 통해 본 사건의 가해 주체가 경찰이었음이 확인되었다.
2) 참고인 하○○ 진술조서(2022. 7. 13.) 그날 경찰에게 붙잡힌 사람은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의 장인과 처남으로, 장인은 총알이 목을 비껴가서 생존하였지만, 중학생이던 처남은 총살되었다고 한다.
3) 신청인 조○구 진술조서(2022. 12. 12.) 진실규명대상자 김○문이 사망하고 김○문의 남편 조○구는 재혼하였는데, 족보에는 조○구의 배우자로 재혼한 부인만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
4) 진실규명대상자 하○훈이 영암중학교 교사였다는 신청인의 진술을 확인하고자 영암중학교에 관련 자료를 요청하였으나, 영암중학교에는 1953년 이전에 생산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신을 받았다. 「교사 재직 여부 등 확인 요청 회신」(영암중학교-1255, 2022. 8. 18.) 다만 신청인은 1949년경 촬영된 영암중학교 교사의 단체 사진 사본을 제출하였는데, 사진 하단에 기재된 성명 중 ‘하○운’이 있다. 하○운은 하○훈의 이명으로 보인다. 신청인은 해당 사진의 사본을 영암초등학교 등에서 교사를 역임했던 하○현으로부터 전달받았다. 하○현은 1954년부터 1995년까지 교사로 재직하였고, 2다-3429 사건의 신청인이다.
5) 참고인 하○○ 진술조서(2022. 7. 13.) 1950년 당시에는 영암문화원 자리가 논이었다고 한다.
6) 「진주하씨대동보(晉州河氏大同譜)」권14, 2000, 833쪽.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6.09.28(월) 1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