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암교회 뒷편 영암성 잔해 |
2024년 영암학회가 3년간의 연구 끝에 발간한 “영암성 영암사람들”은 지역 핵심 문화유산인 영암성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한 의미 있는 성과물이다. 하지만 학술서의 특성상 일반 군민들이 접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여, 본지에서는 그 핵심 내용을 조금 더 쉽고 흥미롭게 재구성하여 4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현대 영암읍 중심가 곳곳에 흔적만 남아있는 영암성은 500여 년간 영암의 역사와 문화의 중심이었다. 최근 영암군의 문화재 보존 및 관광 자원화 노력이 진행되는 가운데, 본 기획은 군민들에게 생활 속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리고 보존과 활용에 관한 관심을 높이고자 하는 바이다.<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영암성, 숨겨진 역사를 만나다
② 영암성 안에서의 하루
③ 불꽃처럼 빛난 영암성의 순간들
④ 기억 속으로 사라진 영암성, 그리고 부활
영암성 안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사람들에게도 전란의 시기는 찾아왔다. 그러나 영암성은 언제나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었다. 특히 1555년 5월 25일, 영암성에서는 조선 역사상 가장 극적인 승리가 펼쳐졌다.
장독샘에 새겨진 승리의 기억
오늘날 영암읍 서남리 삼거리, 양달사 쉼터로 불리는 이곳에는 ‘장독샘’이라는 작은 우물이 있다. 1555년 5월 24일, 영암성이 6천여 왜구에게 포위되었을 때 이곳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물이 귀한 전쟁터, 영암읍 주변을 포위한 왜구들과 3일간 격전을 벌이던 조선군은 갈증으로 전력이 약해지고 있었다. 이때 성안으로 몰래 들어온 양달사 의병장이 군령기를 높이 들고 땅을 내리찍자, 신기하게도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갈증에 시달리던 군사와 백성들은 환호했고,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이것이 바로 영암성대첩의 시작이었다.
![]() ▲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에 있는 장독샘 |
창우대, 전설의 시작
이 놀라운 승리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해 5월 11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왜구 60여 척이 달량성(현 해남 남창)을 침략했고, 당시 영암군수 이덕견이 원병으로 참전했다가 항복해 버린 것이다. 며칠 만에 왜구들은 영암성 주변까지 진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양달사는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전라도사 양응정은 “충효일체(忠孝一體)라 하거늘 어찌 이 난리를 보고만 있으려 합니까?”라는 편지를 보내 격려했다.
5월 25일 새벽, 양달사의 비책이 펼쳐졌다. 창우대(倡優隊)가 향교 앞에서 신명나는 굿판을 벌이자, 밤새 성을 포위하고 지쳐있던 왜구들이 하나둘 구경하러 나왔다.
![]()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속의 1940년대 남사당패의 공연. 당시 창우대도 이러한 공연을 펼쳤을 것으로 보인다. |
바로 그때였다. 향교 뒷산(현 범바위산)에 매복해 있던 의병들이 일제히 돌격했다. “영암성 홍보 책자”에 실린 창우대의 돌격 상상화를 보면, 북과 징소리에 맞춰 춤추던 창우대가 순식간에 칼을 빼들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양달사는 도망치는 왜구를 금교(현 영암여중·고 앞) 쪽으로 유인했다. 농번기라 물을 뺀 군더리방죽은 진흙 구덩이가 되어 있었다. 왜구들이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의병들은 단숨에 적을 섬멸했다.
![]() ▲ 창우대의 돌격 장면(상상화) |
감춰진 영웅, 양달사
하지만 이 극적인 승리의 주인공은 역사에서 지워졌다. 관찰사 김주는 당시 관군을 이끌던 전주부윤 이윤경만의 공으로 보고했고, 양달사는 ‘상중(喪中)’이라는 이유로 포상에서 제외되었다.
그해 12월, 장흥 벽사역 벽에 누군가 시를 붙였다. “유공달사귀하처(有功達泗歸何處, 공이 있는 양달사는 어디로 갔나)” - 백성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이윤경은 그 공으로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지만, 전라도 백성들 사이에서는 논공행상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300여 년 동안 전라도 유생들의 끊임없는 탄원 끝에 1847년 양달사는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왕조실록」과 「국조보감」 등 정사(正史)에는 이윤경의 공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임란과 정유재란, 영암성이 지켜낸 것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영암은 왜구의 직접적인 침입을 받지 않았다. 「선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한다. “전라도에서 나주·광주·영암·진도·순창 등의 군에는 적이 침입하지 않았다” 견고한 영암성 덕분이었다.
하지만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달랐다.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왜군이 18일 영암으로 들어왔다. 구림의 양반 박승원이 남긴 「연보」는 당시 상황을 생생히 전한다.
“노비 옥금이 내 앞에서 아들을 찾으며 호생(내 아들 이름)이라 부르기에, ‘어찌하여 상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하고 물으니, ‘왜령(倭將)이 상전을 상전으로 하지 말라 해서 이렇게 합니다’라고 하였다”
왜군은 양반을 죽이고 노비를 해방시키려 했다. 종이로 된 호패까지 나눠주며 회유했다. 하지만 영암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이종성 군수가 이끄는 영암성은 너무나 견고해서, 왜군들은 성 밖에서만 약탈하다가 10월 7일 물러갔다. 이종성은 정유재란 때 영암성을 방어한 공으로 1599년 부산첨사로 승진했다.
![]() ▲ 1872년 지도에 그린 영암성대첩 전황도(戰況圖) |
의병의 고장, 영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영암에서는 수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문후소, 박대기는 고경명 막하에서, 박흡, 최희민은 김천일 막하에서 활약했다. 연촌 최덕지의 후손 최개(崔漑)는 최경회 장군의 격문을 받고 참전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했다.
특히 영암 출신 이계정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수군으로 활약했고, 그의 사위 정운 장군도 큰 공을 세웠다. 곽기수와 노남성은 선조를 호종했고, 문익현은 소사 전투에서 명나라 수군 대장 진린의 향도관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는 전몽성·전몽진 형제, 김덕흡, 류장춘, 류희춘, 서희서, 양우신 등이 활약했다. 전몽성 형제와 김덕흡, 양우신 등은 해암포 전투에서 목숨을 바쳤다. 이 전란으로 도갑사의 ‘관음 32응신도’가 약탈당하고, 영보정과 회사정이 불타는 아픔도 있었다. 향교 역시 다시 소실되어 1603년 황정노, 문후소 등이 재건해야 했다.
영암성이 남긴 교훈
영암성의 역사는 단순한 전쟁 이야기가 아니다. 위기의 순간 백성을 지킨 방어시설이자, 의병과 관군이 하나 되어 싸운 화합의 상징이며, 역사의 진실을 끝까지 지켜낸 영암 사람들의 집념이 담긴 곳이다.
벽초 홍명희는 1929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 『임꺽정』에서 영암성을 이렇게 묘사했다. “장흥성은 둘레가 천 척 안이나 영암성은 4,369척인 전라도 내에서 큰 성이요, 전주성과 광주성 높이가 8척인데 영암성은 15척이다. 성안의 물도 대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 물 걱정할 곳이 아니다”
현재 영암군에서는 영암성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조례 제정을 추진 중이며, 2021년과 2022년에는 양달사 의병장 궁도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또한 범바위산 매복지에서 금교언까지 이어지는 ‘영암성대첩길’ 조성도 추진 중이다.
다음 회에서는 일제강점기 영암성의 수난과 오늘날 복원을 향한 노력에 대해 살펴보겠다.
선호성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6.09.29(화) 07: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