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측부터)미합중국 전쟁부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

얼마 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방한한 존 오소프 미국 상원의원을 만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일본의 한반도 식민 지배에 일조했다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 일부 논객과 반대 측 평자들은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우리가 무능하고 현실을 몰랐기 때문인데, 미국 책임으로 돌렸다고 이 후보를 비판한다.

일견 원론적으로 타당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비판은 강도에게 두들겨 맞고 약탈을 당했는데 힘없고 약해 빠진 당사자가 더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논리다.

어릴적 역사 시간에 필자가 배운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일본의 한반도 식민 지배를 최종적으로 확인한 조약이라고 알고 있다.

이참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대해 이런저런 자료들을 찾아보며 다시 한번 정리해 봤다.

소위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 7월 29일,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특사인 미국 전쟁부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제국의 총리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은밀하게 맺은 협정을 말한다. 당시 태프트는 전쟁부 업무로 필리핀에 가는 길에 잠시 일본에 들러 이 협약을 맺었다.

이 밀약의 목적은 일본 제국의 한국 식민 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식민 지배라는 양국의 이해 관계에 대한 상호 확인이었다.

일단 ‘형식상’으로는 외교 회담 또는 각서 수준에 그치므로, 제3국과의 조약시 상호간 승인을 거쳐야 하는 당시 맺은 한일의정서에는 어긋나지 않는다. 새로 서명된 조약이나 협정 같은 것은 없었고, 아시아 지역에서의 이익 관계를 주제로 일본과 미국 사이에 오고 간 대화에 관한 각서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형식에 주목해 가쓰라-태프트 비망록 혹은 가쓰라 태프트 비각서라 불리기도 한다.

‘밀약’인 만큼, 상당 기간 공개되지 않다가 미국 역사학자 타일러 데네트에 의해 1924년에야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각서의 내용 중 대한제국에 관한 논의를 인용하자면,

“가쓰라는 러일 전쟁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것은 대한제국이며, 이에 대한 타당한 결과로서 대한제국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것이 일본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만일 러일 전쟁이 끝난 뒤에도 대한제국을 내버려 둔다면, 대한제국은 반드시 또 다시 경솔하게 다른 외국 세력과 조약이나 협정을 맺는 옛날 버릇으로 되돌아갈 것이며, 그러므로 러일 전쟁 발발 전과 똑같은 복잡한 국제적 문제를 다시 불러올 것이다. 이상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일본은 대한제국이 전쟁 전 상태로 되돌아갈 가능성 및 일본을 또다시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 끌려들어 가게 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 확실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태프트는 가쓰라의 견해가 정당하다고 전적으로 수긍했으며, 개인적인 의견으로서 다음과 같은 취지를 언급했다. 자신이 이에 대해 장담할 수 있는 권한은 없으나,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서 대한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는 외국과 조약을 맺지 말 것을 요구하는 정도로 대한제국에 대한 종주권, 즉 외교권을 확보하는 것은 러일 전쟁의 타당한 결과이며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또한 태프트는 이 점에 있어서 루스벨트 대통령도 자신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를 근거로 판단해보자면, 가쓰라의 주장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지 않는다면, 대한제국은 또 다시 다른 나라와 독자적으로 조약이나 협정을 맺어, 일본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한반도의 정세에 개입시켜 분쟁을 일으키려 할 것이므로, 이를 막기 위한 ‘타당한 결과’로서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동아시아의 분쟁 종식과 ‘평화’를 위한 길”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태프트 역시 동의했다. 그 역시 조선이 무분별하게 외세를 끌어들여서 강대국끼리의 충돌을 불러오고 전쟁을 부추김으로써 ‘평화’를 깨트린다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먼저 일본과 미국은 동아시아 분쟁의 원인으로 조선을 지목하는 데에 인식을 같이했다. 한반도에서 일본 쪽으로 기운 힘의 무게추를 반대쪽으로 움직이려는 대한제국의 노력은 일본의 이익에 반하며, 이는 동아시아에서 일본, 영국, 미국 간의 협력을 통한 각국의 이익 확대를 방해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패권을 저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 것이고,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에 의견을 같이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이 주장하고 미국이 동의한 ‘러일 전쟁의 타당한 결과’였던 것이다.

아울러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일본과 미국만 공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루스벨트는 1906년, ‘러일 전쟁 종결을 성공적으로 중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당시로서는(지금도 그러하고) 국제 정세, 외교 등의 문제에 관한 열강들만의 당연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상황과 맞물린 당시 대한제국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1882년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조약문 제1조에는 상대국이 외교적 위기에 빠지면 원만한 해결을 할 수 있게끔 돕는 ‘거중조정(居中調停)’, 즉 중재에 관한 내용이 명시돼 있었다.

때문에 당시 미국이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것은 속된 말로 미국이 대한제국의 ‘뒤통수를 때린 행위’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에게 조약문 제1조는 19세기~20세기 청나라, 조선·대한제국이 외국과 맺은 조약들의 첫머리 조항에 앞쪽 이름만 바꾸고 거의 복붙 수준으로 가져다 붙이는, 그저 ‘형식적이고 상투적인’ 외교적 첫머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조선·대한제국의 바람과는 달리 미국은 물론 상대 수교국들의 관심은 오로지 이권에 관한 사항을 자세히 따지는 나머지 조항들에만 있었다. 중재는 막후 교섭이라는 외교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므로, 상대방이 중재를 성실히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지도 않으니 부담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설령 해당 조약에 대해 국내외에서 문제삼아 비판하더라도, 미국은 ‘조선이 스스로의 앞가림을 잘 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저 조약을 맺었던 것뿐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그러지 못하지 않았냐’라는 투로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에서는 미국을 가리켜 유럽의 압제에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세운 나라이며,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지 않으려는 대인배의 나라라고 평가했다. 김홍집이 일본에서 이 책을 들여온 이래로,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들은 미국에 대해서 상당한 신뢰를 뒀고, 처음으로 통상 조약을 체결한 서양 국가 또한 미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당시 조선인의 중화사상이라는 세계관에서 천자의 덕과 유교의 예로써 천하를 교화하는 나라를 ‘중국’에서 ‘미국’으로 바꿔놓은 것에 불과한 환상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이 힘으로 군림하는, 먼로 독트린으로 대표되는 패권주의적인 외교정책과, 제국주의 열강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국제 외교의 현실을 조선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미국은 조선에서 식민지 대신 문호 개방을 통해 이익을 챙기는 정책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일본 제국은 제국주의 열강 클럽에 들어가 이 미국과 한 테이블에 앉게 됐다.

당시 대한제국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는 데도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여전히 사태 파악 못 하고 끊임없이 미국 정부에 외교적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고, 심지어 미국의 환심을 사고자 루스벨트의 딸인 앨리스 루스벨트까지 붙들고 융숭한 대접까지 했으니... 명성황후릉에서 무례를 보인 앨리스와 그 일행들의 행적을 보자면 이미 관계는 끝났다는 것을 보여줬다.

일본의 한반도 식민 지배에 대한 책임과 관련지어진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대한 평가는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 높은 역사학사들의 고견을 찾아 각자가 판단하길 바라며, 필자는 당시의 국제 정세와 맞물린 미국 정부의 행적과 대한제국의 처지에 대한 개략적인 사실들만 살펴본 것으로 끝을 맺는다.

[참고문헌]
(한국어 위키 백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네이버 백과-두산 백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어 위키 백과) Taft–Katsura Agreement

[사진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