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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신북면 장산리 한새다리 희생 사건
진실규명대상자 신○교(2다-2124-47, 신청인 신○백)
진실규명대상자 신○교(辛○敎, 남, 1903년생, 농사, 이장)는 1950. 12. 21.(음력 1950. 11. 13.) 신북면 장산리 한새다리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신청인 신○백(1947년생, 아들)의 진술에 따르면, 신○교는 덕진면 운암리 181번지 송석정마을에서 부인, 아들(신청인)과 거주하였다.
신○교는 송석정마을 이장이었는데, 밤이면 빨치산이 신○교의 집에 찾아와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신○교는 밤마다 찾아오는 빨치산을 피하기 위해 옆집에 살던 신○섭과 함께 마을 뒷산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1950. 12. 어느 날, 신○교와 신○섭은 함께 마을 뒷산으로 피신하기 위해 가다가, 두 사람을 빨치산으로 오해한 경찰에게 붙잡혀 덕진지서로 끌려갔다. 신○교와 신○섭은 지서에 감금되었다가 덕진면과 신북면 경계에 있는 한새다리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덕진지서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총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신○교의 부인과 조카들이 한새다리에 가서 구덩이에 있던 수많은 시신 속에서 신○교의 시신을 찾아 부근에 매장하였다. 이듬해 송석정마을에 있는 선산으로 이장하였다.
신○교가 사망한 후 신○교의 부인이 재가하여 아들 신○백(신청인)은 큰집에서 성장하였고, 신○교의 제사를 별도로 지내지 못하고 살았다.1)
참고인 신○팔(1950년생, 이웃)의 진술에 따르면, 참고인의 아버지 신○섭은 같은 마을에 살던 신○교와 함께 피신하러 가다가 경찰에게 발각되어 덕진지서로 끌려갔다. 신○섭, 신○교는 덕진지서에 1주일 정도 갇혀 있다가 1950. 12. 21.(음력 11. 13.) 신북면 장산리 한새다리 부근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신○교의 사망일이 제적등본에는 ‘1951. 10. 3. 본적지에서 사망(1955. 4. 18. 신고)’으로,2) 족보에는 ‘경인(庚寅) 11월 13일 졸(卒)’로 기재되어 있다.3)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 진실규명대상자 신○교의 시신이 신북면 장산리 한새다리에서 신○교의 부인 및 친척에 의해 수습된 점, (2) 신○교의 시신을 수습한 어머니(신○교의 부인)로부터 관련 내용을 전해 들은 신청인의 진술이 구체적인 점, (3) 족보에 기재된 신○교의 사망일이 1950. 11. 13.이고, 신○교과 함께 희생된 신○섭의 족보상 사망일도 같은 날짜인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신○교는 1950. 12. 21.(음력 11. 13.) 신북면 장산리 한새다리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진실규명대상자 신○수(2다-6326, 신청인 신○재)
진실규명대상자 신○수(愼○洙, 이명 신○만, 족보명 신○선, 남, 1925년생, 농사)는 1950. 12. 21.경(음력 1950. 11. 13.경) 신북면 장산리 한새다리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신청인 신○재(1950년생, 아들)의 진술에 따르면, 신○수는 덕진면 노송리 342번지 송외마을에서 아버지, 어머니, 부인, 아들(신청인), 동생들과 거주하였다.
신○수는 1950. 11. 26.(음력 10. 17.)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 옆에 있는 밭으로 보리 파종을 하러 갔다가 경찰에게 끌려갔다. 신○수의 아버지는 신○수가 덕진지서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차남 신○길(신○수의 동생)이 1950. 7. 22.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일이 있었기에4) 덕진지서에 갔다가 남아있는 자녀들과 며느리, 생후 8개월 된 손자(신청인)까지 해를 입을까 두려워 덕진지서에 가보지 못하였다. 며칠이 지나도 신○수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신○수의 아버지 등 가족들이 신○수를 찾으러 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하였다. 신청인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신○수의 가묘를 만들었고, 나중에 가묘를 없애고 가족 수목장을 조성하였다. 신○수의 제삿날은 끌려간 날인 음력 10. 17.이다.5)
신청인은 아버지 신○수의 희생 장소를 모르고 지내다가 2018년에 만난 덕진면 운암리 주민 신○○(1934년생, 고인)로부터 한새다리에 신○수의 시신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은 집안사람인 신○섭이 1950. 12. 21.(음력 11. 13.) 한새다리에서 희생되자 시신을 수습하러 한새다리에 갔다가, 자신과 함께 갔던 마을주민이 그곳에 있던 신○수의 시신을 알아보고 흙을 덮어주는 모습을 보았다.6)
신○수의 사망일이 제적등본에는 ‘1957. 5. 3. 본적지에서 사망(1957. 5. 20. 신고)’으로, 족보에는 ‘기(忌) 10월 17일’로 기재되어 있다.
2007년 피해자현황조사에 ‘신○만, 남, 26, 덕진면 노송리, 1950. 11.경, 총살, 경찰’로 기재되어 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본 사건은 ‘신○수가 1950. 11. 26.(음력 10. 17.) 보리를 파종하다가 경찰에게 끌려간 후 행방불명되었다.’라는 내용으로 진실규명(추정) 결정되었다.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 진실규명대상자 신○수가 경찰에게 붙잡혀 덕진지서로 끌려가 감금되었던 점, (2) 신○수의 제삿날과 족보에 기재된 기일이 경찰에게 끌려간 날인 음력 10. 17.인 점, (3) 신○수의 시신이 수습되지 못하였지만, 신청인이 덕진면 운암리 주민 신○○로부터 1950. 12. 21.경(음력 11. 13.경) 신북면 장산리 한새다리에 신○수의 시신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점, (4) 신○○이 한새다리에서 희생된 신○섭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였고, 신○섭이 같은 마을주민 신○교와 함께 덕진지서로 끌려가 감금되었다가 1950. 12. 21.(음력 11. 13.)에 희생된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신○수는 1950. 11. 26.(음력 10. 17.) 마을에서 밭일을 하다가 경찰에게 붙잡혀 덕진지서로 끌려가 감금되었다가 1950. 12. 21.경(음력 11. 13.경) 신북면 장산리 한새다리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다음에 계속
1) 신청인 신○백 진술조서(2021. 11. 9.) 신청인 신○백은 성인이 된 후 어머니를 만나 아버지 신○교의 사망 경위 및 시신 수습 과정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같은 마을에 살던 신○섭의 부인으로부터 신○섭과 신○백이 함께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신청인은 신○교의 제삿날 및 사망일은 모르고 살았는데, 이번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서 제출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친척으로부터 신○교와 함께 희생된 신○섭의 제삿날이 음력 11. 12.임을 들어서 알게 되었고, 신○섭의 아들 신○팔(2다-1129-39 사건의 신청인)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2) 신청인은 제적등본에 사망일이 1951. 10. 3.로 신고된 경위를 알지 못한다고 진술하였다.
3) 『영산영성신씨대동보(靈山寧城申氏大同譜)』5권, 2002, 344쪽.
4) 신○길(1934년생)은 1950. 7. 22. 영암군 금정면 연보리 차내마을에서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되었다. 신○길에 대해서는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되었다.(다-8846, 신청인 신○재)
5) 신청인 신○재 진술조서(2023. 2. 27.) 신청인은 1950. 3. 9.(음력 1. 21.)에 출생하였다.
6) 신청인 신○재는 한새다리에서 희생된 신○섭의 아들 신○팔(2다-1129-39 사건의 신청인)과 함께 신○섭의 시신을 수습한 신○○을 만나 관련 내용을 듣던 중, 신○○로부터 한새다리에 신○수의 시신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후 신청인과 신○○은 2018. 3 25. 신○○이 이야기한 내용으로 사실확인서를 작성하였다. 신○○은 2018. 6. 20. 영암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6.10.16(금) 11: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