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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용흥리 주민 희생사건
1950년 12월 18일 용흥리 세흥마을 주민들은 아침부터 연보리 쪽에서 들리는 총소리 에 놀라 피난을 나갔다. 그러나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임규보(당시 61세)·이효임(당시 56세)이 군경에게 사살되었다.
임규보는 나이도 많고 건강이 좋지 않아 처와 막내아들 임형관(당시 8세)과 함께 집에 남아 있었다. 이때 군경이 집에 들어와 임규보 부부를 사살했는데 이를 목격한 아들 임형관은 “경찰이 소를 달라 하여 아버지가 대문에까지 소를 끌고 나갔는데 갑자기 아버지를 쏘고 어머니를 쏘았다. 나도 죽을 뻔했는데 내가 너무 놀라 넘어지니 그냥 가버렸다”고 진술하였다. 시신은 임규보의 아들 형제 임형우(당시 16세)·임형채(당시 12세)가 수습하였다.
제적부에는 임규보는 “1954년 1월 9일”, 이효임은 “1954년 1월 10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인들은 이날 세흥마을에서 임규보 가족 외 3∼4명이 더 희생되었다고 진술하였으나 신원은 파악할 수 없었다.
1950년 12월 18일 냉천마을을 필두로 연산마을·다보마을·용흥리 세흥마을에서 주민 180여 명이 해병대·영암경찰에 의해 희생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중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122명이었다.1)
국제신보 1950년 12월 25일자 보도에 의하면 “해병대가 12월 15일 부터 1주일 동안 영암지구 월출산, 국사봉 ‘잔비소탕’에 출동하여 ‘적 사살 327명의 다대한 전과’를 올렸고 ‘아방 피해는 전사 3명’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국제신보 보도의 ‘잔비’ 상당수는 비무장 민간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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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찰대 일일 적 동향보고서」를 보면 영암경찰서가 1950년 12월 중순에 이르러 금정면에서 집중적인 토벌작전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3)
아천리 김흥두 희생사건
1950년 11월 30일 마을 보초를 서던 김흥두(당시 25세)가 경찰에게 희생된 사건
이 사건이 발생할 무렵 금정면에는 경찰이 진주하지 못해 빨치산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었다. 빨치산이나 지방좌익은 군경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지역주민에게 보초를 서라고 강요하였다. 당시에는 군경토벌대가 마을에 들어오면 주민들을 빨치산 협력자로 간주하여 무조건 총격을 가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주민들은 보초가 ‘군경이 온다’고 깃발을 흔들거나 큰 소리로 외쳐 신호를 보내면 생존을 위해 일단 야산으로 피난하곤 하였다. 따라서 당시 상황에서 보초를 서는 것은 강압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주민들 입장에서 보면 살아남기 위한 자구수단이기도 했다.
1950년 11월 30일 아천리 삼박마을에서 보초를 서던 김흥두와 김종수가 경찰에게 발각되어 사살되었다.
식산마을 주민 이종수(당시 27세)는 “경찰이 넘어와서 누구냐 물었는데 김흥두가 모르고 ‘보초다’ 하니까 함께 보초 서던 김흥두와 김종수를 영암면 쪽 고랑으로 끌고 가 죽였다”고 진술하였다.
신청인 김정두(당시 21세·김흥두 사촌 동생)·삼박마을 주민 김수환(당시 19세)도 김흥두가 아직 수복이 되지 못한 상태라 주민들이 피난 다니던 상황에서 토벌 온 경찰의 눈에 띄어 죽었다고 진술하였다.
김흥두의 시신은 수습되었다. 김종수는 유족을 찾을 수 없어 신원이나 시신수습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음에 계속
1) 희생자 판단근거는 이 보고서 ‘3. 사건 조사결과’에 기재하였다.
2) 국제신보, 1950. 12. 25.
3) “1950년 12월 13일 오전 4시 경찰전투부대 2개 소대가 금정면 금정산지역을 토벌하였다. 그 결과 빨갱이 11명을 사살, 포로 21명을 사로잡고 수류탄 5정을 노획하였다.”(1950년 12월 20일자 보고); “1950년 12월 14일 오전 4시 경찰 2개 소대가 금정면지역으로 소탕작전을 벌여 적 11명을 사살, 포로 31명, 수류탄 5정, 비밀자료 등을 노획하였다.”(1950년 12월 19일자 보고).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6.09.29(화) 19: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