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봉의 메아리: 세 영혼을 찾아 울리는 침묵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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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봉의 메아리: 세 영혼을 찾아 울리는 침묵의 절규
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1) #016
  • 입력 : 2024. 10.11(금) 13:30
  • 이민정 기자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1951년 3월경 미수복 지역인 금정면 국사봉에는 토벌을 피해 피난 온 주민들이 많았다. 또한 빨치산은 영암에서 장흥에 걸쳐 있는 유치지구를 제3지구(유격대 사령관 황점택)로 정하고 활동하였다.1)

한편 ‘비상경비사령부’는 3차에 걸친 ‘전국잔비섬멸기간’을 설정하여 경찰이 공비에 대하여 대공세로 전환하도록 하였다. 제1차 ‘잔비섬멸기간’인 1951년 3월 1일부터 4월 10일까지는 치안력이 미치지 않는 미수복 지역을 완전 수복하는 데 1차적인 목표를 두고 작전을 독려하였다.2)

1951년 3월 국사봉에서는 경찰의 5개군 합동작전이 계속되었다.


용흥리 김종열 3남매 희생사건

금정면 용흥 3구는 국사봉과 가까운 산악지대로 용천·학동·안적 등 3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용천·학동·안적마을은 1950년 12월 18일에 연보리 냉천·다보·연산마을, 용흥리, 남송마을 등과 마찬가지로 불태워졌다. 그러나 일부 주민들은 타지 않고 몇 채 남은 집에 함께 살았고 여기에 빨치산이 내려와 자고 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주민들은 부역자로 몰릴까봐 경찰이 오면 피난을 나가기 일쑤였다.

1951년 3월 8일 경찰은 용흥리에 들어와 주민들을 신북면 소재지로 소개시켰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군경의 명령에 따라 소개 나갔으나 김종열·김정임·김귀복·김종화3)(당시 13세) 4남매는 젊은 청년들을 따라 금정면 내산으로 피난을 나갔다.

이들은 며칠 뒤 내산에서 경찰에게 붙잡혀 ‘장흥경찰서’로 연행되어 구금되었고 이 중 김종열·김정임·김귀복 3남매는 지금까지 생사불명인 상태이다.

당시 영암 경찰 기동대원이었던 ○○○(당시 21세)·○○○(당시 16세·의경)은 “1951년 봄 무렵 국사봉을 비롯한 금정면지역에서 5∼6개군(강진·장흥·나주·영암·화순 등) 합동작전이 여러 번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한국경찰대 일일 적 동향보고서」를 보면 1951년 3월경 장흥경찰이 금정면지역에서 공비소탕작전을 벌인 기록이 있다.4)

장흥경찰은 4남매 중 김종화(당시 13세)가 나이도 어리고 열병을 앓고 있는 환자여서 ‘먼저 집으로 돌아가 있으면 형이랑 누나들도 곧 보내겠다’며 풀어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종화로부터 3남매가 구금되었다는 말을 듣고 김종화의 어머니가 장흥경찰서로 찾아갔다. 그러나 이들이 이미 영암경찰서로 인계되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영암경찰서로 찾아 갔으나 영암경찰서는 이들의 행방을 확인해주지 않았다.

다음에 계속


1) 정관호, 전남유격투쟁사, 도서출판 선인, 43~45, 52쪽.
2) 국방부, 한국전쟁사 51971, 927쪽, 936~937쪽
3) 신청인 김종삼 진술조서(2008.3.12.). “형 김종화는 2008년 2월에 돌아가셨다.”
4) “1951년 3월 20일 장흥경찰서 1개 소대가 금정면 용흥리 영지마을 전체 지역을 소탕하여 적 9명을 죽이고 2명의 포로를 잡았다.”(1951년 3월 26일자 보고).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