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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국사봉 피난민 희생사건
남송마을도 1950년 12월 18일 연보리 냉천·다보·연산마을과 용흥리 세흥마을 등과 마찬가지로 경찰 소개 작전으로 당시 60여 가구 중 막집 1채만 남기고 다 타버리자 주민들은 산중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1)
1951년 3월 12일 가족들과 함께 국사봉으로 피신해 생활하던 최윤복이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최윤복의 처인 참고인 김효순(여·당시 28세)은 “마을이 불타버린 후 피난을 나가 2∼3개월 동안 금정 내산에서 살았다. 그날은 국사봉 밑 점산 계곡으로 피난을 갔는데 같이 있던 시아주버니가 ‘번들번들하니 경찰이다’라고 해서 도망치는데 갑자기 뒤에서 총소리가 났다. 나는 남편이 총에 맞은 줄도 모르고 아들(당시 2세)을 등에 업고 정신없이 도망쳤다. 그날 저녁에 남편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 시신은 이틀 후 시동생(최윤호·당시 21세)과 함께 수습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남송마을 주민인 참고인 김장환(당시 23세)은 “최윤복 등 마을사람 여럿이 국사봉에서 피난생활을 같이하였다. 그러다가 최윤복이 경찰토벌에 걸려 도망치다가 죽었다”고 진술하였다.
한대리 주민인 황운례·김영재 모자도 1950년 12월 20일 경찰의 소개령으로 마을이 불타자 국사봉으로 피난을 나갔다.
1951년 3월 국사봉지역에 대한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국사봉 주변 피난민들은 국사봉을 빠져나가거나 일부는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황운례는 아들 김영재가 열병에 걸려 국사봉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남게 되었다.2)이들은 국사봉 ‘상여바위’에서 토벌작전 중이던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황운례의 남편과 6촌간인 김경윤(당시 16세)은 목격자의 전언(傳言)을 빌어 “국사봉 상여바위 밑에 숨어 있는 영재랑 형수(황운례)를 발견하고 경찰이 나오라고 했는데 형수가 빨리 안 나오니까 경찰이 총을 쏴버려 형수가 죽었다. 똑똑한 학생이었던 영재는 ‘나는 영암면 누구 아들인데 나를 살려주면 은혜는 잊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어머니를 죽였으니 영재를 살려주면 복수할까봐 경찰이 영재까지 죽였다”고 진술하였다.
황운례·김영재 모자의 시신은 부근에서 사건을 목격한 같은 마을 주민들에 의해 국사봉 상여바위 부근에서 수습되었다.
남송리 주민 희생사건
1951년 1∼2월경 군경은 남송리에 다시 소개명령을 내렸다. 주민들은 경찰의 토벌작전으로 마을이 소개되어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도 없는 상태에서 한겨울을 산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1951년 3월 12일 무렵부터 국사봉에서 7개군 합동연합작전이 1주일 동안 있었다며 신청인과 경찰 측 참고인은 이를 ‘일주일전쟁’이라고 불렀는데 특히 1950년 3월 18일은 “총소리가 제일 심한 날”이었다고 진술하였다.3)
이날 국사봉으로 피신하였던 남송리 주민 등 피난민들은 토벌작전 중이던 군경에게 붙들려 영암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연행자 중 남송리 주민 이천우·김명근·김금석은 조사를 받던 중 차에 실려 나간 후 행방불명되었다.
가족 모두가 영암경찰서에 구금되었던 신청인 이영례(여·당시 20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경찰서에서 소금이랑 주먹밥 한 덩이씩 배급받으며 있었는데 옆에 있던 올케언니가 ‘애기씨, 오빠(이천우)가 죽으러 간 것 같아요. 얼굴에 검정 숯을 잔뜩 칠했는데 트럭에 실려나갔어요’”라고 했다.
그날 가족과 함께 영암경찰서에 연행되었던 남송리 주민 김장환(당시 24세)은 “그날 해병대가 문초를 한 이천우·김명근·김금석(당골 아들) 등 몇 사람은 차에 실려 나갔다.
해병대가 반란군한테 습격을 받아 2∼3명이 죽었는데 그 앙심으로 그날 잡혀온 사람들을 죽였다는 말이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나머지 주민들은 3월 19일 석방되었다. 경찰은 이들을 풀어주며 “경찰서 부근에 친척집이 있으면 그리로 가라”고 해서 주민들은 지인을 찾아 흩어졌고 살아남은 ‘젊은 남자’ 대부분은 자수를 하고 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다음에 계속
1) 신청인 최윤호 진술조서(2008.2.28.). “내산으로 피난 가서 구덩이 파고 산에서 잤다. 당시는 어디 빠져나가기도 힘들었다. 이불이며 음식이며 다 짊어지고 다녔다. 쫓기다보면 굶기도 했다.”
2) 신청인 김춘자 진술조서(2008.4.29.). “할머니·여동생과 나는 국사봉에 장흥·영암·강진 합동작전이 들어온 날 날을 새서 영암면 쪽으로 빠져나왔는데 오빠가 장질부사 열병을 앓고 있어서 오빠와 어머니는 영암면으로 피신 나오지 못했다.”
3) 신청인 이영례 진술조서(2008.3.12.); 참고인 ○○○ 진술조서(2008.8.13); 참고인 ○○○ 진술조서(2008.8.13.). 영암경찰서 방문 자료조사(2008.8.12.) 퇴직자 이력서철영암경찰서 소장 퇴직자 이력서철에서 당시 영암경찰서 사찰계 사복으로 근무한 박일규의 이력서 내용 중 “4284(1951)년 3월 17일 국사봉 작전에서 공비 11명 사살, 생포 2명, 기타 총기 3정 노획으로 표창장 수여”라는 부분을 확인하였다. 날짜는 하루 차이가 나나 이 무렵 경찰의 국사봉 작전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6.09.29(화) 19: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