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주목한 영암 도갑사, 그 천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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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주목한 영암 도갑사, 그 천년의 기록
영암 지역사 대기획 - 시간의 흐름 속 영암 ②
  • 입력 : 2025. 01.24(금) 12:13
  • 선호성 기자


영암열린신문은 지난해 11월 21일 영암 한국트로트가요센터에서 개최된 ‘영암 지역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학술대회의 연구 성과를 5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영암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는 이번 기획은, 1,357기에 달하는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영산강 유역의 선사문화, 고려·조선시대 도갑사의 역사와 위상, 조선시대 향약 자료의 특징, 일제강점기 영보정 사건의 실체, 해방 이후 영암 지역사회의 변화상까지 아우른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영암의 역사적 사실들을 각 분야 전문가들의 연구 성과를 통해 새롭게 살펴봄으로써, 영암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미래 발전의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 1,357기의 고인돌이 말하는 영암의 선사시대
② 국가가 주목한 영암 도갑사, 그 천년의 기록
③ 조선시대 향약을 통해 본 영암의 사회상
④ 일제강점기 영보정 사건의 진실
⑤ 해방 이후 영암의 상처와 성장

천년 고찰 도갑사(道岬寺)는 고려시대부터 남다른 위상을 지녔다. 조선 세조 4년(1458) 국왕은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담은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50부를 인출(印出)하여 전국 주요 사찰에 나누어 주었는데, 영암 도갑사가 그 수혜 사찰 중 하나였다. 당시 최고의 문화유산인 대장경을 받았다는 사실은 도갑사의 사격(寺格·절의 등급)을 잘 보여준다.


국가가 인정한 특별한 사찰

국장생과 황장생이 증명하는 천년 전 도갑사

도갑사 입구에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특별한 석물(石物)이 있다. “國長生(국장생)”과 “皇長生(황장생)”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두 돌기둥이다. ‘나라가 세운 장생’, ‘황제가 세운 장생’이라는 뜻을 가진 이 석물들은 도갑사가 단순한 시골 사찰이 아닌, 국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찰이었음을 보여준다.

▲ (오른쪽부터) 도갑사 국장생과 황장생, 고려시대부터 도갑사가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석물

장생(長生)은 사찰을 보호하고 지원하기 위해 국가가 설치한 표지물이다. 1085년 통도사의 국장생 석표(石標)에는 “국가가 장생을 관리한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장생이 국가 관리 시설이었음을 알려준다.

국가는 어떻게 도갑사를 지원했나

도갑사는 고려전기부터 ‘비보사찰(裨補寺刹)’이었다. 비보사찰이란 나라를 보호하고 지키는 역할을 맡은 사찰로, 국가가 직접 사찰을 대표하는 주지스님(住持)을 임명하고 운영에 필요한 토지인 사사전(寺社田)을 지급했다.

발굴조사 결과는 고려전기 도갑사의 번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대규모 건물터와 함께 현재까지 전해지는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과 오층석탑(五層石塔)은 당시 도갑사의 위상을 증명하는 문화유산이다.


조선의 새로운 전기를 맞다

세조는 왜 도갑사를 주목했나

조선 초기, 불교계가 큰 타격을 입는 와중에도 도갑사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1457년 세조는 도갑사에 ‘감역교지(減役敎旨)’를 내려 각종 노역의 의무를 면제해주었다. 이는 당시 국왕이 도갑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이러한 특별 대우의 배경에는 당대 최고의 고승 수미(守眉) 스님이 있었다. 그는 불교계 최고위 직책인 선종판사(禪宗判事)를 지냈으며, 도갑사 해탈문(解脫門) 상량문(上樑文)에는 국왕의 스승이라는 뜻의 ‘왕사(王師)’로까지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 도갑사 해탈문, 1473년 수미의 중창 때 세워진 건물로 현재 보물로 지정


10년에 걸친 대대적 중창불사

1464년부터 시작된 도갑사 중창(重創)은 약 10년에 걸친 대역사였다. 1473년에 지어진 절의 정문인 해탈문의 상량문에는 건립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대시주(큰 후원자) 왕사 판선종 국일도대선사 수미”, “도대목(건축 책임자) 대선사 각여” 등 9명의 참여자 명단이 남아있다.

중창 당시 새로 지어진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과 불상, 불화는 조선전기 불교미술의 뛰어난 수준을 보여준다. 특히 해탈문에 봉안되었던 목조 문수동자상과 보현동자상은 당대 최고의 조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문화유산을 지켜온 사찰

전란의 위기를 넘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부분의 사찰이 불타 없어졌지만, 도갑사는 특별했다. 1662년 간행된 ‘도갑사사적(道岬寺事蹟)’에 따르면, 1555년 을묘왜변 때 왜구들이 도갑사에 불을 지르려 했으나 불이 저절로 꺼졌고, 이를 본 왜구들이 “다시는 불을 지를 생각을 하지 않겠다”며 물러났다고 한다.

1597년 정유재란 때도 도갑사는 병화(兵火)를 피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덕분에 도갑사는 15세기 수미의 중창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다.

▲ 도갑사 사적, 1662년 간행된 책으로 도갑사의 역사를 상세히 기록


문화유산 창조와 보존의 중심지로

17세기 도갑사는 더욱 적극적으로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창조했다. 1653년에는 당대 최고의 문신들이 참여한 ‘도선국사수미비(道詵國師守眉碑)’가 세워졌다.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비문을 짓고, 명필 오준(吳竣)이 글씨를 쓰는 등 최고의 격식을 갖추었다.

▲ 도선국사수미비, 1653년 세워진 비석으로 영의정 이경석이 비문을 지음

1650년부터 1656년 사이에는 불교 경전과 의식집 4종을 간행했다. 이 시기에는 부휴계(浮休系) 문파의 영향 아래 수행과 강학, 의례 등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왕실 원당(願堂)으로서의 역할도 중요했다. 1550년 공의왕대비는 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관세음보살삼십이응신도(觀世音菩薩三十二應身圖)’를 조성해 도갑사에 봉안했다. 18세기에는 왕실 내수사(內需司)의 원당 25개 사찰 중 하나로 지정되어 각종 잡역을 면제받았다.

▲ 관세음보살삼십이응신도, 1550년 공의왕대비의 발원으로 제작된 불화

고려시대 국가 비보사찰에서 조선의 명산대찰로,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져 온 도갑사의 역사는 우리나라 불교사의 중요한 한 축을 보여준다. 특히 수미 스님의 중창 이후 도갑사가 이룩한 문화적 성취는 영암의 자랑이자 호남 불교의 역량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도갑사의 현재

월출산 도갑사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다. 국가지정문화재로는 해탈문(보물)이 있으며, 도선국사와 수미대선사의 유적을 기리는 비석, 조선시대 불화와 불상 등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 손성필 교수



이 기사는 지난 2024년 11월 21일 영암 한국트로트가요센터에서 개최된 ‘영암 지역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손성필(조선대학교) 교수의 ‘고려·조선시대 영암 도갑사의 역사와 위상’ 논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선호성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1,357기의 고인돌이 말하는 영암의 선사시대2025-01-03 13: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