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태열 영암발전희망연대 회장 (손태열 회장은 시종면장, 도포면장, 환경녹지과장, 건설과장 등을 역임한 30년 경력의 전직 공무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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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월 27일, 영암군민들이 처음으로 군수를 직접 선출했다. 34년간 중단됐던 지방자치가 완전히 부활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30년. 1960년대, 한때 14만을 넘었던 영암의 인구는 1995년 5만 5천 명까지 감소했다가, 대불산단 활성화에 힘입어 2005년 6만 2천 명에 육박하며 회복세를 보였다. 하지만 2025년 현재 다시 5만 명 선까지 내려왔다. 이 인구 곡선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다섯 명의 군수가 여덟 번의 민선 군정을 이끌었다. 대불국가산업단지는 100% 분양됐고, 도로망은 촘촘히 확충됐으며, 지역 농산물은 브랜드화됐다. 하지만 단 한 명의 3선 군수도 나오지 않았고, 군민들의 기대 속에 추진되던 대형 프로젝트들은 좌초했으며, 청년들은 여전히 고향을 떠나갔다. 지방자치 30년. 영암은 무엇을 이루었고, 무엇을 놓쳤는가. 어디서 길을 잃었고, 어디서 길을 찾았는가. 본지는 1995년 그날부터 오늘까지, 영암이 걸어온 30년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확인된 사실과 객관적 데이터, 그리고 30년을 관통한 생생한 증언을 통해 영암이 써 내려온 역사를 기록한다. 과거는 단순한 추억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며, 미래를 여는 열쇠다. 이것이 본지가 영암 지방자치 30년의 궤적을 되짚는 이유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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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① 1995년 6월 27일, 영암의 선택 - 862표가 만든 역사
② 데이터로 본 영암 30년: 양적 성장 속 질적 과제
③ 증언 - 지방자치 30년을 관통한 목소리
④ 의정을 말하다 - 현직 군의원 인터뷰
⑤ 미래를 묻다 - 차기 군수 후보들의 비전


“실력으로 승부하던 관선 시대가 끝나고, 측근정치가 판치는 민선 시대가 왔습니다. 지역원로는 사라졌고, 침묵만이 남았죠. 우리가 나선 이유는 단 하나, 절박함이었습니다.”

30년 공직생활을 마치고 퇴직한 손태열(75) 영암발전희망연대 회장이 지난 9월 10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던진 일성이다. 시종면장, 도포면장, 건설과장 등을 거치며 관선과 민선을 모두 경험한 그는 영암 행정 50년사의 산증인이다.

내년 6월 지방선거를 8개월 앞둔 지금, 영암은 또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인구 5만 붕괴 위기, 재정자립도 12.1%라는 엄중한 현실 속에서 차기 리더십이 갖춰야 할 자질은 무엇일까. 손 회장의 증언은 과거를 돌아보는 회고를 넘어, 영암의 미래를 고민하는 유권자들에게 묵직한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

2021년 창립된 영암발전희망연대는 퇴직 공무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순수 시민단체다. 군정 비판과 대안 제시, 의정활동 평가 등을 통해 ‘사라진 지역원로’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손 회장은 회원들과 함께 정리한 서면답변서와 2시간여의 대면 인터뷰를 통해 지방자치 30년의 명암을 가감 없이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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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는 양심은 지역침체를 방조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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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함에서 시작된 시민운동

영암발전희망연대 창립 배경을 묻자 손 회장은 ‘절박함’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민선 1기부터 5기까지는 그런대로 잘 진행됐어요. 그런데 5기를 지나면서 뭔가 독선적이고, 선거 때 공을 세운 사람들 위주의 팬덤정치가 시작됐죠. 측근들이 군정을 좌지우지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엔 오해도 많았다. 퇴직공무원들이 기득권을 지키려 한다는 시선, 특정 후보를 지지하려는 정치조직이라는 ‘찌라시’까지 돌았다. 하지만 일관되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묵묵히 활동한 결과, 이제는 군민들의 신뢰를 얻어가고 있다는 것이 손 회장의 설명이다.

“우리는 객관적 자료에 근거해 평가합니다. 행정정보공개청구로 얻은 데이터를 분석해 군의원 의정활동 평가를 발표했고, 올해 연말에는 2차 평가도 예정돼 있습니다. 이번엔 순위도 매길 생각입니다. 주관적 판단이 아니라 자료를 바탕으로 하니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죠.”


관선에서 민선으로 - “일에서 처세로”

1995년 6월 27일, 박일재 초대 민선군수가 당선됐다. 34년 만의 지방자치 부활이었다. 당시 공직사회는 어땠을까.

“우려가 컸어요. 중앙통제에 익숙했던 공무원들이 갑자기 지방의회 통제를 받아야 한다니... 거부감이 상당했죠.”

손 회장은 관선과 민선의 결정적 차이를 '평가 기준의 변화'로 꼽았다.

“관선 때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됐어요. 실력으로 보여주면 진급도 하고. 우리 때는 밤 11시, 12시까지 근무하는 게 일상이었죠. 그런데 민선이 되면서 달라졌어요. 실력은 그렇게 중요치 않더라고. 선거 때 어느 편에 섰느냐가 더 중요해진 거예요.”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해요. ‘손금이 다 닳도록 일만 한 사람은 공직자들이 선호하는 자리에 가지도 못하고, 필요 없는 사람은 출세한다’고. 누가 봐도 현실인데, 현직 공무원들이 표현을 못할 뿐이죠.”

▲ 1995년 7월 1일 제36대 박일재 영암군수 취임식

“합법성보다 합목적성을 생각했더라면”

30년 공직생활을 회고하는 손 회장의 답변에는 아쉬움도 묻어났다.

“업무를 처리하면서 당연히 법과 원칙을 따라야 하죠. 하지만 지나치게 규정에 얽매이다 보니 유연한 행정을 펼치지 못했어요. 합법성보다 합목적성을 더 생각했더라면... 그게 아쉽습니다.”

그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했다.

“공무원들이 1~2년마다 부서를 옮기다 보니 전문성을 쌓기 어려웠어요. 건설과에 있으면 도로법, 행정직은 또 다른 법... 그때그때 법 조문만 적용하느라 정작 ‘이 법이 왜 만들어졌는지, 주민들에게 진짜 필요한 게 뭔지’를 깊이 고민할 여유가 없었죠.”

‘합목적성’이란 법의 목적과 취지를 살려 주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유연하게 행정을 펼치는 것을 의미한다. 손 회장은 “법에는 약간 어긋나더라도, 주민 전체에게 도움이 된다면 어느 정도 허용하는 유연함이 필요했다”며 “그런 판단과 결단이 부족했던 것이 지금도 마음에 남는다” 털어놨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아쉬움을 넘어, 한국 관료제의 구조적 한계를 돌아보는 깊은 통찰이기도 하다. 법치행정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주민의 실질적 필요를 충족시켜야 하는 공무원의 딜레마, 그 균형점을 찾지 못한 아쉬움이 30년 경력 공직자의 성찰로 남은 것이다.


30년의 성과와 실패 - 정치가 가른 명암

손 회장은 지방자치 30년의 최대 성과로 대불산단 활성화를 꼽았다.

“국가가 만들어놓고 공실이 많아 활성화가 안 되던 것을 민선 군수들이 100% 분양시켰죠. 덕분에 한때 군 세입이 연 200억까지 늘었어요. 4년이라는 안정적 임기가 보장되면서 장기 프로젝트를 책임감 있게 추진할 수 있었던 것, 그게 민선의 힘이었습니다.”

영암-독천 간 지방도 4차로 확장도 빼놓을 수 없다. “전남에서 세 번째로 지방도 4차로를 만들었어요. 획기적이었죠. 민선의 재정 여유 덕분에 10년 걸릴 일을 5년 만에 해냈습니다.”

하지만 실패 사례를 묻자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바둑테마파크 무산은 정말 잘못된 거예요! 천황사 진입로도 중단됐고, 월출산 스테이션F도 축소됐죠. 전임자가 해놓은 것을 후임자가 뒤집는 거예요. 자기 공이 안 되니까. 관선이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민선자치가 가져온 정치적 책임감과 추진력은 분명한 성과를 낳았지만, 동시에 정치적 이해관계가 지역발전을 가로막는 부작용도 낳았다는 지적이다.

▲ 바둑테마파크 조감도

▲ (왼쪽부터) 월출산 스테이션-F 조성사업(트리탑데크, 스카이스테이션)

인구 5만 붕괴 위기 - “일자리만으론 부족하다”

영암의 최대 위기는 인구소멸이다. 한때 13만이던 인구가 5만으로 줄었다.

“일자리 창출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요. 교육환경, 주거환경, 문화여가... 정주여건 전체를 개선해야 합니다. 정주인구뿐 아니라 생활인구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죠.”

차기 군수가 갖춰야 할 자질을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든든한 중앙부처 인맥이 필요합니다. 불편하지만 이게 현실이에요. 공모사업 하러 중앙부처 가보면 경상도 출신 공무원이 많아요. 호남은 별로 없고. 인맥 없이는 사업 따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강하게 경고했다.

“선거 과정에서 도움을 준 측근들을 챙기는 인사는 지역의 미래를 암울하게 할 겁니다. 측근정치가 영암을 망치고 있어요.”


“침묵은 공범이다”

손 회장은 지역사회의 침묵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관선 시절엔 지역원로들이 목소리를 냈어요. 군정을 견제하고 방향을 제시했죠. 그런데 민선이 되면서 사라졌습니다. 팬덤정치 속에서 원로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 거예요.”

그는 지역 오피니언 리더들을 향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식자층은 알면서도 몸을 사리고, 사회단체는 연대해야 할 때 입을 닫고, 의회는 주어진 권한마저 제대로 행사 못하고 있어요. 침묵하는 양심은 지역침체를 방조하는 겁니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영암발전희망연대의 역할을 묻자, 그는 단호했다.

“우리는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중립을 지키며 객관적으로 평가할 뿐이죠. 각 후보의 공약을 분석해 영암 발전에 꼭 필요한 정책이 무엇인지 정리해서 군민들께 알릴 계획입니다. 선택은 군민이 하는 것이고, 우리는 판단 자료를 제공할 뿐입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손 회장은 후배 공무원들에게 당부했다.

“비굴한 측근이 되지 마세요. 맡은 업무의 최고 권위자가 되어, 어떤 단체장이 와도 중용될 수밖에 없는 실력 있는 공무원이 되길 바랍니다.”

75세의 노(老) 공직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둔 영암, 우리는 30년의 경험에서 무엇을 배우고, 앞으로의 30년을 위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