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보정 사건, 일제강점기 영암의 가장 뜨거웠던 항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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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보정 사건, 일제강점기 영암의 가장 뜨거웠던 항일투쟁
영암 지역사 대기획 - 시간의 흐름 속 영암 ④
  • 입력 : 2025. 02.21(금) 11:27
  • 선호성 기자
▲ 영보정(永保亭) 전경. 1931년 이곳에서 일어난 항일 시위는 ‘영보정 사건’으로 불리며 영암의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다.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암열린신문은 지난해 11월 21일 영암 한국트로트가요센터에서 개최된 ‘영암 지역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학술대회의 연구 성과를 5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영암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는 이번 기획은,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영산강 유역의 선사문화, 고려·조선시대 도갑사의 역사와 위상, 조선시대 향약 자료의 특징, 일제강점기 영보정 사건의 실체, 해방 이후 영암 지역사회의 변화상까지 아우른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영암의 역사적 사실들을 각 분야 전문가들의 연구 성과를 통해 새롭게 살펴봄으로써, 영암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미래 발전의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 1,357기의 고인돌이 말하는 영암의 선사시대
② 국가가 주목한 영암 도갑사, 그 천년의 기록
③ 영암은 왜 호남 최고의 향약 보물창고가 되었나
④ 영보정 사건, 일제강점기 영암의 가장 뜨거웠던 항일투쟁
⑤ 해방 이후 영암의 상처와 성장


‘영암의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불꽃

1932년 6월 4일(음력 5월 1일),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의 형제봉 아래 ‘영보정’에서는 70여 명의 농민들이 모여 노동절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표면적으로는 산유회(山遊會)라는 이름의 야유회였지만, 실상은 ‘조선을 일제의 굴레에서 이탈시키고 무산계급 독재사회를 수립’하기 위한 집회였다.

참가자들은 토지 소유의 불평등과 소작제도의 폐해를 비판하며 “일인은 우리의 논과 밭을 내놓아라”, “마름의 횡포를 지양하라”, “일인은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노동가를 부르는 시위대는 선두에 붉은 깃발을 내세우고 마을로 행진했다.

당시 ‘영암의 모스크바’라 불리던 영보리, 모산리, 구림리 등 양반마을에서 젊은이들이 주도한 이 시위는 곧 ‘영보정 사건’(일명 ‘형제봉 사건’)으로 불리며 영암 독립운동사의 상징이 되었다.


사건의 뿌리, 영암의 사회경제적 배경

영보정 사건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1920년부터 시작된 영암지역의 청년회와 야학이 그 토대가 되었다. 1920년 7월 영암청년회가 창립된 이래, 영암무산청년회, 영암청년동맹 등으로 이어지며 사회운동의 기반을 다져왔다.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지역 곳곳에 설립된 야학이었다. 1922년 10월 시작된 영암노동야학회는 설립 당시 17명이던 학생 수가 한 달 만에 107명으로 증가할 정도로 호응을 얻었다. 덕진면 영보리, 신북면 모산리, 군서면 구림리 등지에 설립된 야학들은 단순한 문맹퇴치를 넘어 민족의식과 사회변혁 의식을 고취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1930년대 초 영암지역 농촌사회의 현실은 사건 발발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1930년 전남사정지(全南事情誌)에 따르면 당시 영암군 농가의 경영구조는 지주 1.8%, 자작농 8.5%, 자작 겸 소작농 43.9%, 순소작농 45.8%로, 약 90%가 소작농이었다. 특히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 지주들이 소유한 토지가 많았고, 이들의 폭력적인 소작료 징수와 불합리한 소작권 이동이 농민들의 불만을 키웠다.


조직된 저항,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의 탄생

1931년 7월, 도쿄 유학 중 공산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김판권이 고향인 영암 덕진면 영보리로 돌아왔다. 그는 최판옥, 곽명수 등 지역의 젊은 사회운동가들과 만나 영암농민조합 창립을 추진했다.

영암농민조합 창립을 위한 집회는 1931년 10월 영암경찰서에 의해 금지되었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1931년 11월 최판옥은 자택에서 ‘영암농민조합 창립준비회 규약’을 작성해 100부를 인쇄했고, 이로 인해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다.

그러나 운동은 계속되었다. 1932년 4월 18일, 최판옥, 김판권, 유용희(유혁), 곽명수는 영보리 뒷산에서 비밀리에 모여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를 결성했다. 최판옥을 책임자로 하고 각자 교양부, 내부조직연락부, 외부조직연락부, 출판부 등을 맡아 활동하기로 했다.


야학을 통한 의식화, 정치적 각성의 장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는 야학을 통해 농민들의 정치의식을 고양시켰다. 곽명수와 김용운 등은 미암면 두억리 야학에서 “자본가는 우리 무산농민을 고도로 착취하고 있고, 자본가 자제는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는데 무산자의 자제는 야학에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현 사회의 불평등을 비판했다.

최동림은 영보리 야학생 100여 명에게 “민중의 기(旗), 적기(赤旗)에 전사의 시체를 싸서 장사 지내는 사이에 피로 물든 붉은 깃발을 높이 들자”는 내용의 ‘민중의 기’라는 창가를 가르쳤다. 또한 1932년 3월 7일에는 영보리 야학회관에서 ‘처(妻)의 후회’라는 제목의 공산주의자 가정을 중심으로 한 연극을 200여 명의 마을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소작권 투쟁, 농민들의 자발적 참여

1932년 3월부터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는 소작권 이동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3월 22일 덕진면 운암리 청년회관에서는 소작권 이동에 반대하는 회의가 열렸고, 청년회원들이 직접 출동해 구 소작인들의 경작권을 지키기로 결의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32년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일에 시위를 계획했으나, 경계가 심해 실행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음력 5월 1일인 양력 6월 4일을 메이데이 기념일로 삼아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영보정 시위, 그 뜨거웠던 하루

1932년 6월 4일, 최판옥과 김판권은 영보정에 덕진면 운암리, 영보리, 노송리, 장암리 등지의 청년회원 70여 명을 모았다. 오후 4시경, 이들은 형제봉에서 산유회를 마친 후 일제에 협조적인 마름과 새로 소작권을 취득한 소작인들에게 항의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시위대는 적기를 선두에 세우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노동가를 부르면서 운암리 방면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운암리의 박찬수, 신병진, 박한용, 박춘상 등의 집과 백계리의 신일권, 김상문 등의 집을 차례로 방문하며 “다른 사람이 소작하는 토지를 빼앗아 소작하는 것은 괘씸하다”며 항의했다.

시위는 때로 과격한 양상을 띠기도 했다. 일부 참가자들은 박찬수, 박춘상, 박봉상, 신일권, 김상문 등을 구타하기도 했다. 이들은 “소작권 이동을 방지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이어나갔다.


일제의 대대적 탄압과 재판

시위 직후 영암경찰서는 광주경찰부에 지원을 요청하고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일제 당국은 이 사건을 단순한 소작쟁의가 아닌 ‘공산당 사건’으로 규정하고 100여 명을 체포했다.

검거된 이들 중 67명이 ‘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협박’, ‘업무 방해’, ‘가택 침입’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1933년 9월 15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열린 제1회 공판은 긴장감이 넘쳤다. 법정 내외에는 수십 명의 정사복 경관이 배치되었고, 방청은 20명으로 제한되었다. 피고인들의 가족들은 자녀의 얼굴이라도 보려고 먼 길을 왔으나 대부분 법정에 들어가지 못했다.

재판 과정에서는 피고인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옥중에서 전향한 최판옥에 대해 유혁, 김판권, 곽명수 등이 강하게 비판하며 별도 재판을 요구하기도 했다.


사건의 결말과 의의

1933년 9월 29일 판결에서 최고 징역 5년에서 최저 벌금 20원까지 다양한 형이 선고되었다. 피고인들의 항소로 이어진 2심 재판에서도 1934년 3월 7일 대구복심법원은 최고 징역 5년부터 최저 벌금 30원까지 선고했다.

영보정 사건은 조선의 독립과 사회변혁을 꿈꾸었던 영암지역 청년들의 항일투쟁이자, 소작제도의 불합리함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이었다. 이 사건으로 무려 100여 명이 검거되고 67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들의 정신은 꺾이지 않았다.

2018년 독립유공자 포상 심사 기준이 완화된 이후, 현재까지 영보정 사건 관련자 57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이는 이 사건이 단순한 소작쟁의가 아닌,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소중한 투쟁이었음을 국가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 영암군 덕진면 영보마을에서 열린 제46회 영보풍향제 모습. 1979년부터 시작된 이 행사에서는 1932년 영보정 사건을 재현하며 항일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매년 5월 열리는 영보풍향제는 지역의 역사적 자긍심을 고취하고 주민 화합을 도모하는 축제로 자리잡았다.


사건 이후 영암 지역사회의 변화

영보정 사건 이후 영암 지역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다수의 야학이 폐쇄되었고, 청년회는 어용화되었다. 1937년 10월 영암 전군 청년단 대회에서는 300여 명이 참가해 행사를 마친 후 신사를 참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경제적 어려움도 가중되었다. 한재(旱災)까지 겹쳐 1935년 8월에는 영암군 시종면에서만 200여 농가가 고향을 떠나 광부나 노동자로 전락했다. 1936년 4월에는 영암군민 85명이 나진항 개발 노동자로 모집되어 떠났고, 1938년에는 약 300명이 만주와 이북지방 공사장으로 떠났다.

지역에 남은 소작농들의 삶도 녹록지 않았다. 1937년 7월 영암군의 소작조정 신청 건수는 99건으로, 1936년 55건에 비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독립운동가들의 이후 행적

영보정 사건 참여자들의 이후 행적은 다양했다. 사건 주도자인 최판옥과 김판권은 옥중에서 전향했고, 김판권은 1938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대구지부 참가대표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일제 말기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해방 후에는 일부는 우익계열에서, 일부는 좌익계열에서 활동했다. 최병수는 한국전쟁 당시 내무서장을 역임했고, 이기범은 1953년 자유당에 들어가 덕진면의회의원을 지냈다. 반면 최상호는 해방 후 영암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 참여했다가 1949년 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목포교도소에서 사망했다.


영보정 사건의 현대적 의미

오늘날 영보정 사건의 의미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한국 농민운동사의 중요한 한 장이자, 영암 지역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특히 지역 명문가 출신 청년들이 민족의 독립과 사회 변혁을 위해 앞장섰다는 점, 야학을 통해 평범한 농민들의 의식을 고양시켰다는 점, 그리고 지식인과 농민이 연대하여 일제에 맞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영암군은 2019년부터 영보정 사건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영보정 복원사업과 함께 기념관 건립, 교육자료 개발 등을 통해 지역의 자랑스러운 항일투쟁 정신을 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최은진 교수



이 기사는 지난 2024년 11월 21일 영암 한국트로트가요센터에서 개최된 ‘영암 지역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최은진(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의 ‘일제하 전남 영암 영보정 사건과 지역사회’ 논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선호성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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