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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열린신문은 지난해 11월 21일 영암 한국트로트가요센터에서 개최된 ‘영암 지역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학술대회의 연구 성과를 5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영암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는 이번 기획은,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영산강 유역의 선사문화, 고려·조선시대 도갑사의 역사와 위상, 조선시대 향약 자료의 특징, 일제강점기 영보정 사건의 실체, 해방 이후 영암 지역사회의 변화상까지 아우른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영암의 역사적 사실들을 각 분야 전문가들의 연구 성과를 통해 새롭게 살펴봄으로써, 영암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미래 발전의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 1,357기의 고인돌이 말하는 영암의 선사시대
② 국가가 주목한 영암 도갑사, 그 천년의 기록
③ 영암은 왜 호남 최고의 향약 보물창고가 되었나
④ 영보정 사건, 일제강점기 영암의 가장 뜨거웠던 항일투쟁
⑤ 인민위원회에서 보도연맹까지, ‘격동의 70년’ 영암 현대사
일제의 굴레 벗고 새 출발…인민위원회 등장과 좌절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영암 주민들도 다른 지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감격과 희망에 넘쳤다. 숨겨두었거나 급하게 만든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일제시기 항일독립운동의 주역들이 해방 직후 영암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영암에서는 해방 직후 나흘 만에 조극환(曺克煥, 1887~1966)을 위원장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가 조직됐다.
조극환은 영암공립보통학교 교사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부터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해 온 인물이었다. 그는 신간회, 농민조합 활동 등을 전개하며 일제 경찰에 여러 차례 연행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독립유공자로 서훈(1990년)되기도 한 그는 건준 조직 이후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영암의 건준과 인민위원회는 일제 권력이 사라진 상황에서 치안 유지, 공공시설 보호, 일본인 재산 관리, 식량 분배 등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했다. 주민들의 지지 속에 운영되던 인민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증언처럼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인민위원회의 위세는 대단했지. 하루는 농장 주민이던 일본인 가와이(河合)의 저금통장을 들고 현금을 찾으러 갔어. 통장에 돈이 상당히 있었지... 담당 직원이 액수에 놀라더구만. 일본인 예금을 찾으려면 위원장 결제를 받아야 한다고 했어. 위원장을 찾아갔더니 ‘적산’이기 때문에 못 찾아 간다고 한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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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진주, 자치질서 무력화와 행정 재편
1945년 10월 23일 목포에 진주한 미군 제55군정중대는 목포를 비롯해 인근의 영암, 무안, 해남 등지를 관할하게 됐다. 미군정은 처음부터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행정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1월 초, 목포 미군정중대에 누군가가 ‘영암 인민위원회가 군민들을 폭행하며 금품을 갈취한다’고 신고했다. 이를 계기로 미군은 영암 지역까지 들어와 인민위원회 위원장 조극환을 연행했고, 새로운 군수와 경찰서장을 임명하며 인민위원회를 해체시켰다.
전남 도인민위원회 위원장 박준규와 부의장 국기열도 결국 경찰에 연행됐다. 당시 광주지검 검사장 여철현이 이들의 구속을 거부했다가 오히려 자신이 ‘명령 불복종’이라는 죄목으로 군정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1년과 벌금형을 선고받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미군정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지역사회를 재편해 나갔다. 해방 직후 새로운 사회를 염원하던 영암 주민들의 자치적 움직임은 힘을 잃게 됐다.
식량난과 콜레라 창궐…해방 직후 이중고에 시달린 영암 주민들
해방 이후 영암을 비롯한 전남 지역은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일제시기부터 계속되어온 농지 소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미군정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토지와 재산을 ‘귀속재산’으로 동결시켰다. 그 결과 식민지 시대의 지주-소작 관계가 청산되지 못했고, 소작쟁의가 계속됐다.
더 큰 문제는 식량난이었다. 미군정은 처음에 인민위원회의 식량 배급제를 폐지하고 ‘자유시장제’를 도입했으나, 쌀값과 물가가 폭등하자 곧 식량 공출 정책으로 선회했다.
1946년 1월 25일 미군정은 ‘미곡수집령’을 공포했는데, 이는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특히 농업 중심지였던 전남은 높은 할당량을 부과받았다. 전남에 부과된 미곡 할당량은 75만 석으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았다.
당시 전남농민조합 대표들은 “쌀을 팔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쌀이 잘 방출되지 않은 이유는 일반 물가가 조정되지 않아서 농촌에서 필요한 생필품은 매우 고가로 매입하고 농민이 가지고 있는 쌀은 과도한 염가로 팔고 있다”고 호소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기에 1946년 여름에는 콜레라까지 창궐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당시 전남 인구 3백만 중 약 30만 명이 콜레라 환자로 추정될 정도였다. 8월 1일에는 영암 주민 700여 명이 모여 콜레라 환자 격리시설을 파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쌀을 내놓으라” 식량 공출 반대 농민시위 확산
1946년 10월 13일 밤에는 1,000여 명의 군중이 집회를 열고 다음날 새벽까지 시위를 벌였다. 미군 부대가 출동했고, 경찰서 부근에서 시위하는 군중들을 향해 경찰이 발포하기도 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건이 1947년 3월 1일 발생했다. 이날 신북과 영암읍의 농민들이 시위를 전개하다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했다. 미군 정보 보고에 따르면, 신경질적인 경찰이 발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총 3,000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위는 당시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또한 1948년 3월 15일에는 식량난이 극에 달해 영암 주민들이 식량관리영단의 수집미 창고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군서면 양창리, 삼호면 서창리와 서호리, 영암면 장암리 등에서 수백 명의 주민이 쌀 수천 가마를 반출해갔다. 경찰과 소방대원이 출동해 대부분을 수거했지만, 이 사건은 당시 영암 주민들의 절박한 상황을 보여준다.
![]() ▲ <미곡 수집 협조 전단>, 미군정이 제작하여 배포한 전단으로 미곡 수집에 협조할 것을 종용하는 내용이다. 미군정은 ‘미곡 수집령’을 발포하고 ‘조선 생활필수품 회사’를 설치하여 미곡의 강제 수매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생산량이 떨어진 상태에서 생산량의 3분의 1이상을 수집하여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
경찰과 국방경비대 충돌…영암에서 발생한 ‘6·3사건’ 파장
1947년 6월 3일, 휴가 나온 광주 제4연대 사병이 부대로 복귀하던 중 경찰과 사소한 말싸움을 벌인 것이 발단이 됐다. 이 갈등은 곧 총격전으로 확대됐다.
광주의 제4연대 병력들이 전화선을 끊고 새벽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지만, 이미 대비하고 있던 경찰의 반격으로 국방경비대 측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양측의 총격전은 미군 고문관과 함께 온 제4연대장 이한림 소령의 중재로 겨우 끝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당시 물리력을 가진 국가기구들 사이의 갈등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례다. 사건 이후 제4연대의 일부 사병들이 여수의 제14연대로 파견됐다는 점에서, 이후 1948년 10월 발생한 여수·순천 10·19사건(여순사건)과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분석도 있다.
여순사건 여파로 빨치산 출몰, 군경의 지역 장악력 강화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에서 시작된 여순사건은 전남 동부지역과 경남 서부, 전북 남원 등으로 확산됐다. 직접적인 전투 지역은 아니었지만, 영암 지역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48년 12월에는 빨치산(당시 표현으로는 ‘무장공비’)이 영암군 미암지서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9년 2월에는 미암면 일대에 빨치산이 출현해 면사무소를 습격했고, 같은 달 18일에는 군서면 도갑사 부근에서 30여 명의 빨치산과 영암경찰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경찰 1명이 사망했다.
여순사건 이후 정부는 강력한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영암에 주둔하던 제5사단 제20연대 제2중대가 도갑사 인근에서 빨치산과 교전하기도 했다. 군과 경찰은 시가전 훈련을 실시하며 대비태세를 갖추었고, 군 정보기관들이 민간인에 대한 사찰을 강화했다.
1949년 국민보도연맹이 조직됐는데, 이는 좌익 활동 경력자들을 체제 내로 편입시키기 위한 조직이었다. 하지만 이 조직에 가입한 사람들은 한국전쟁 직후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된다.
한국전쟁의 비극, 영암 금정면에서 벌어진 민간인 희생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약 한 달 후인 7월 24일, 북한 인민군 제6사단이 영암 지역에 진입했다. 당시 영암 경찰은 월출산(809고지)으로 물러나 유격전을 전개하다가 결국 해남으로 철수했다. 이후 북한 인민군에 밀려 청산도로 탈출했다.
전쟁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학살이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영암에서는 금정면 연소리 덤재(7월 15일)와 금정면 연보리 차내마을 뒤 야산(7월 22일) 두 곳에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집단 희생됐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희생자는 22명이지만, 실제로는 100~3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영암 경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역사적 진실 규명과 공동체 회복의 길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까지 영암은 이념 갈등과 폭력의 시대를 겪었다. 해방 직후 꿈꾸었던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은 미군정과 분단, 전쟁 속에서 좌절됐고, 지역사회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특히 영암 구림마을의 사례는 이념 갈등이 어떻게 한 공동체 내에서도 분열을 가져왔는지 보여준다. 구림 연구에 따르면, 마을 내 가문들은 좌우이념에 따라 갈라졌고, 한국전쟁 시기 상당수 주민이 희생됐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는 영암지역 민간인 희생의 실상을 밝히는 계기가 됐다. 금정면 연소리와 연보리에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집단 희생된 사실이 공식 확인됐으며, 공식 집계보다 훨씬 많은 희생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진실 규명 과정은 영암 지역사회에 화해의 토대를 마련했다. 구림마을에서는 비극적 사건의 유족들과 가해자 가족들이 함께 화해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향약과 동계 전통을 가진 영암의 공동체 정신이 이러한 회복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노영기 교수는 영암지역의 역사적 경험이 지역사 연구의 중요한 사례가 되고 있으며, 과거의 아픈 역사를 직시하는 것이 진정한 화해와 공동체 회복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단순히 영암만의 문제가 아닌, 현대 한국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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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지난 2024년 11월 21일 영암 한국트로트가요센터에서 개최된 ‘영암 지역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노영기(조선대학교) 교수의 ‘해방 후 영암지역의 변화와 학살’ 논문을 바탕으로 작성됐다.
선호성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6.09.29(화) 15:48





















